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화살나무 이파리가 빨갛게 물들었다. 길손에게는 가을이 깊어가니 순간을 잊지 말고 잘 살아가라고 알리는 것 같다. 내려가는 기온에 빨리 가을 색으로 물들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꽃과 나무들,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 지났으니 이제 늦가을로 접어든다. 울긋불긋 물들어 흩날리는 단풍잎을 따라 마음에도 살랑살랑 바람이 이는 날, 맑게 갠 하늘에 따스한 햇볕을 등에 받으며 출근하다가 잠시 순간의 평온을 느껴본다.

세상이 아무리 야단법석을 해대어도, 코로나가 제아무리 끈질기게 이어져도, 자연의 시계는 늘 흔들림 없이 째깍째깍 가고 있지 않던가. 봄이 온 줄도 모르는 우리를 위해 꽃도 활짝 피어났고 뜨거운 햇살로 여름을 느끼게 했고 이젠 꽃집마다 탐스러운 국화 화분이 줄지어 서 있는 가을이 찾아와 우리에게 이 한때 잠시 숨돌려보라고 재촉한다. 국화가 만발한 들판에서 마음껏 들숨 날숨 해가며 가을을 즐기고 싶은 마음은 모두 굴뚝같지 않으랴.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즐기던 이도 어느새 따뜻한 커피를 선호한다. 커피 잔을 통해 전해오는 따스함을 느껴가며 커피 향을 맡을 수 있는 평화로운 가을을 맞을 수 있다면, 놀랍고 걱정스러운 것 없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면, 지금 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겠는가.

한 시대를 풍미하던 삼성가의 이건희 회장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친인 이병철 회장 타계 후 13일 만에 회장에 취임했다는 이건희 회장, 오랜 숙고 끝에 내놓은 것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이었다고 하지 않은가.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심정을 토로했다. “1987년 회장에 취임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내가 제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두 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들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얼마나 답답한 심정이었을까. “마누라·자식 빼곤 다 바꿔라” 외치던 그의 결단으로 지금의 삼성을 만들지 않았던가.

세상 참 덧없다고 허전해하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건장하게 생활하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심폐소생술과 온갖 최신의 의료기술로 소생은 했지만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수년 병원에서 지내다가 갑자기 저세상으로 가버렸다는 소식을 들으니 백세 시대라고 하는 요즘에 팔순도 못 넘기고 떠난 그의 일생, 아쉬움도 많았을 것 같아 생각이 자꾸만 맴돈다.

일전에는 호세 무히카(85) 전 우루과이 대통령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서민적인 대통령이었던 그를 우루과이 국민들은 “페페”라 불렀다. 그는 특히 대통령답지 않은 청빈한 생활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대통령궁을 노숙자에게 내주고 본인은 원래 살던 농가에서 출퇴근했고,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도 화초 키우는 일을 계속했다. 1987년식 폴크스바겐 비틀 자동차를 직접 몰고 다녔고 대통령 월급의 90%를 기부했다. 그가 많은 말을 하지만 결코 국민을 속이지 않는 대통령,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지만 ‘철학자’로 불리는 대통령이라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는 명연설가로 기억되기도 한다. “우리는 더 많이 일합니다. 돈 나갈 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할부금을 다 갚을 때쯤이면, 인생이 이미 끝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앉아서 일하고 알약으로 불면증을 해소하고 전자기기로 외로움을 견디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계화를 막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생각이 지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무히카는 좌익 게릴라로 무장 투쟁에 나섰고 군사 독재 시절에는 총 15년간 감옥살이까지 했다고 한다. 그의 고별사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린다. 85세에 정계를 떠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증오는 불길입니다. 불타는 사랑은 뭔가를 창조하지만, 증오는 우리를 파괴합니다. 나는 수십 년 동안 내 정원에 증오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미워하면 어리석음에 이르고 객관성을 잃는다는 게 내 삶에서 힘들게 얻은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증오가 난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두가 힘든 이때 사람들은 내 편이 아닌 상대편에 대해서는 쉽게 분노를 표출한다. 정치무대에서 퇴장하는 무히카 전 대통령에게 국민은 “고마워요, 페페”라며 환호했다. 수십 년 동안 정원에 증오는 심지 않았다던 지구 반대편 노정객의 고별사가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하지 않았던가. 이를 되새기면서 오늘 우리 마음의 정원엔 무엇을 심어볼까.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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