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일보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안연미 ‘헛제삿밥’

발행일 2020-11-03 13:54:1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안연미
민속박물관을 둘러보고 월영교를 건넌다. 조선 시대 원이 엄마의 애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는 나무다리이다. 먼저 떠난 지아비를 그리워하는 여인의 애틋한 절규를 아는지 모르는지 강물은 바람 따라 유유자적 노닌다. 다리 마주한 저편에 밥집이 보이는 것을 보니 마침 점심때인 것을 알리는 듯하다. 안동 하면 헛제삿밥이지 하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기와를 올려 고풍스러운 두 밥집이 나란히 이웃해 있다. 다정해 보이는 모습이 과연 선비의 고장답다. 어느 집이나 내가 살던 고향의 옛집을 닮았다.

자리에 앉자 밥보다 먼저 구수한 숭늉이 나온다. ‘숭늉’이라는 말 그 자체가 예스럽다. 숭늉은 제례를 행할 때 반드시 뒤따르는 물이다. 옛날에는 ‘익은 물’이라 해서 숙수라고 불렀다. 솥 밑바닥에 눌어붙은 밥알 누룽지에 찬물을 붓고 끓여 낸 우리만의 전통 조리법이다. 따끈한 숭늉을 후 불어가며 마시니 밥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한 줄 모르겠다. 선비의 묵향이 풍길 것 같은 방 안에서 점잖게 시장기를 감추는데 드디어 헛제삿밥이 들어온다.

헛제삿밥은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만, 제사음식과 똑같이 음식을 차려 먹는 이 지역의 전통음식이다. 헛제삿밥에는 유래가 있다. 서원에서 밤늦도록 글을 읽느라 속이 허해진 유생들이 배를 채우려는 명분으로 허투루 제사를 지낸 후 제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 옛날 관습과 격식을 고집했던 양반 고장에서 유생들이 가짜 제사를 핑계로 음복을 했다 하니 예나 지금이나 허기 앞에 체통 차리기는 힘든 일인가 보다.

밥상은 단출해 보여도 있어야 할 것은 다 갖추었다. 줄을 세워 제기에 담은 음식은 격식부터 다르다. 앞줄에 고봉으로 담은 기름진 이밥 한 술에 농부의 노고를 맛본다. 뭉근하게 익힌 소고기뭇국의 진한 국물에서는 장작이 타들어 가는 열기가 전해지는 듯하다. 노르스름하게 구워낸 두부전, 애호박전, 밀가루에 살짝 숨어 쫄깃한 맛을 내는 다시마전, 배추전, 달걀 물을 입혀 지져낸 생선전, 상현달 모양으로 자른 삶은 달걀까지 나름대로 풍미가 있다. 어디 이뿐이랴. 경상도 제사상에 빠질 수 없는 상어고기 돔배기는 육질이 부드럽고, 찜통에 넣어 수증기로 익힌 고등어는 담백하고 씹을수록 구수하다.

기름진 음식을 먹은 입맛에 대한 배려인가, 붉은색을 낸 안동식혜 맛이 궁금하다. 한술 떠서 맛을 보니 톡 쏘는 생강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엿기름으로 삭힌 밥알과 잘게 썬 무의 아삭한 식감이 여느 지방의 식혜와는 사뭇 다르다. 오랜 세월 지켜 내려온 선조들의 올곧은 정신으로 빚어낸 숙성된 맛이리라. 법도와 예법을 지켜 내려온 고장의 음식은 하나하나 정성이 깃들어 있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무래도 제사음식의 백미는 비빔밥이다. 누르스름한 놋그릇에 담긴 나물은 볶고 무쳐내어 정겹게 둘러앉은 모양새가 단란한 가족의 모습과 흡사하다. 어디선가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 덕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풍경이다. 도라지, 콩나물, 고사리, 무, 시금치, 호박, 잘게 썬 시래기나물을 밥에 비벼 정겨운 이들과 한자리에 모여앉아 먹기에는 더할 나위 없을 듯하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도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다. 제사나물 삼채 중에 흰색의 무와 도라지는 뿌리식물이니 조상을 이름이요, 고동색의 고사리는 나무의 한 줄기로 기둥이 되는 부모를 가리킴이다. 푸른 잎의 나물들은 자손을 가리키니 참으로 귀하고 조화롭다. 뒤섞여도 각자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맛과 향이 깃든 음식이다. 나물 비빔밥에 묵은 정까지 보태어 버무리니 식감이 서로 다른 나물이건만 자신의 색과 향을 잃지 않고도 잘 어울린다.

아! 옛사람들은 제삿밥에 어찌 비빔밥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제사라고 하면 각지에 흩어져 살던 후손들이 모이는 날이 아닌가. 조상을 모신 자리에 자손들을 불러 모아 나물밥을 비벼놓고 격 없이 둘러앉아 하나가 되자는 뜻이 깃든 것은 아닐런가. 제사음식을 장만하느라 고생했던 아녀자들도 한자리에 둘러앉아 비빔밥을 먹게 했던 깊은 뜻도 담겼으리라. 잘해도 못해도 덮어주고 감싸주는 우리 고유의 정서가 담긴 비빔밥이야말로 가족을 정 하나로 어우르고 싶었던 우리 선조들의 합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족이라 해도 노력 없이 하루아침에 덜커덕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과정을 겪어야만 얻어지기 때문이다. 서로 부대끼며 살아오는 동안 여러 번 나를 내려놓는 과정을 겪어야 끈이 이어질 것이다. 부족하면 채워주고 때로는 손에 물을 묻히는 수고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숙성된 마음을 보듬고 키우면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리라. 그래서 제사가 있는 것이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고 흩어져 있던 산 자도 모이게 하는 것이 제사요, 같이 어울렁더울렁 서로 비벼 살라고 제삿밥이 있는 것이다.

헛제삿밥은 비록 조상을 모시는 제사에는 올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밥 한 상으로 윗대에서 내려오는 전통 그리고 조상의 뜻을 새기는 문화를 엿보게 해주는 밥상이다.

선조들의 어우르는 정신이 묻어난 점심 한 끼로 속과 마음을 든든히 채우고 일행은 가뿐하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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