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씻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릴 때가 있지// 음악,/ 세상의 모든 부딪힘// 젓가락에 집힌 허공은 왜 짠가/ 웃음과 울음 눈물의 꼭짓점/ 알고 보면 다 같은 가락// 쌀쌀쌀 쌀이 손가락을 간지럽힐 때/ 사이 사이를 오가는 물고기/ 간지러움이 소리가 될 때// 모든 사이는 부딪힘의 내력/ 사이가 낳은 소리 나는 쓴다// 고플수록 궁금한 속내/ 발보다 코가 빠를 때가 있지/ 프로는 들숨날숨 코로 연주하지

「대륜문학」 (대륜문학회, 2020)

운명교향곡은 베토벤의 제5번 교향곡을 말한다. 그 첫 소절에 대해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 했다는 풍문으로 인해 운명교향곡이란 별명이 붙었다. ‘미미미 도, 레레레 시~’하고 연주가 시작될 때 죽음의 사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듯 장엄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 이유로 운명교향곡이란 별명이 정식 곡명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을 능가하는 예술은 없는 법이다. 음악과 미술, 문학도 그 예외일 수 없다. 만물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는 자연의 고유한 울림이다. 소리 높이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능력, 즉 절대 음감을 가진다면 주변의 인위적 소리는 물론 자연의 소리도 모두 음표로 옮겨놓을 수 있다. 세상은 모두 울림으로 이뤄져 있으니 세상은 곧 음악이고 교향악이다. 베토벤은 운명을 음악으로 형상화시켰지만 김지훈 시인은 운명을 시로 표현해낸 셈이다.

쌀 씻는 소리가 듣기 좋은 음악으로 들리면 배가 고플 때일 것이다. 그 때 들리는 소리는 어떤 음악보다 반가운 느낌을 준다. 서걱서걱 부딪히고 빡빡 비비며 서로 갈등하는 가운데 쌀알은 가장 풍요로운 화음을 창조해낸다. 음악은 조화로운 소리이지만 세상의 모든 부딪힘으로 인해 발생하는 거친 소리에서 출발한다. 세상만사 서로 마찰을 일으키고 부대끼며 돌아가는 듯 보이긴 하지만 결국 그 본질은 평화롭게 화합하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일궈가는 데 있다.

젓가락에 집히는 허공은 허공이 아니다. 웃음이 녹아있고 울음이 스며있다. 그 꼭짓점에서 눈물로 맺어지는 허공은 눈물의 간이 배여 있다. 즐거움을 상징하는 듯 보이는 웃음은 행복감을 주고 슬픔을 나타내는 울음은 카타르시스를 통해 진한 감동을 불러온다. 웃음은 빠른 가락을 타고 울음은 느린 가락을 타고 다니지만 목적지에서 눈물로 만나는 운명에 직면한다.

쌀이 손에 스치는 촉감은 뿌듯하고 부드러울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쌀알이 부딪히고 갈등하는 마찰음이다. 쌀알과 쌀알의 사이에서 물고기가 스치듯 간지러운 소리가 발생하고 그 소리는 시시때때로 다르게 변이한다. 같은 쌀알의 울림이라하더라도 일의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 쌀알 교향곡은 그 사이의 깊은 내력을 담아낸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악보가 다르고 사람과 상황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진다.

소통하는 쌀알의 소리를 듣는다. 손가락에 전하는 그 촉감을 느낀다. 눈에 비치는 그 모습을 본다. 배가 고플수록 그 속뜻이 궁금해진다. 허나 급할수록 돌아가야 실수가 없다. 프로가 들숨 날숨을 이용해 코로 악기를 연주하듯이 행동보다 냄새가 더 유용할 수 있다. 눈이나 귀보다 코가 빠르고 정확할 때가 있다. 오감을 다 동원해야 그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손가락에 스치는 쌀알의 내력을 시인은 마침내 문자로 표현한다. 쌀알 교향곡은 이제 시가 됐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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