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본의 아니게 시간이 남아돌고 있다. 비자발적 실업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어서다. 당초엔 1개월 정도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준비부족이 발목을 잡고 있다. 어쩔 수 없다. 남는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내는 방법을 찾을 수밖에….

비자발적 실업자의 일상 중에서 게을러지지 않는 방법 중의 하나는 긍정적인 생각이다. 그전에는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미뤄왔던 일들을 차근차근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어서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평소엔 쉽지 않았던 점찍어둔 영화를 보는 것도 그렇다.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찾다가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된 영화의 여운이 깊었다.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o)’라는 커피에 관한 다큐영화였다. 매일매일 새로운 커피를 마시며 조금씩 커피 맛을 알아가는 중이어서 ‘모두를 위한 커피’라는 부제에도 강하게 이끌렸다.

스토리는 단순했지만 영화에 담겨진 뜻은 남달랐다. 무대는 이탈리아 나폴리의 카페 ‘감브리누스’. 이곳에선 이탈리아어로 ‘미루어진 커피’라는 뜻의 카페 소스페소라는 독특한 방식의 커피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커피를 마신 사람이 한 잔 값을 더 내고 영수증을 통에 넣고 가면 돈이 없는 누군가가 그 영수증을 카운터에 제출하고 커피를 마실 수 있다.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맡겨둔 커피’가 더 어울리겠다.

이탈리아인들에게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조건일 정도로 필수다. “한 잔 하실래요?” 한국에선 당연히 술을 이야기하는 이 한마디가 이탈리아에선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커피를 나누자는 의미다. 이탈리아에서 커피 기부운동이 생겨난 이유이다. 영화에서 카페 소스페소는 ‘잔에 담긴 포옹’이라고 표현한다. 따뜻한 커피 한잔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따뜻함을 전해주는 마법이다. 그래서인지 커피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사회적 연대라고도 하지 않던가.

영화 ‘카페 소스페소’는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커피를 내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해진 주인공이 없이 커피로 얽힌 이들 각자의 삶을 비춰준다.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 중에는 교도소에 수감 중인 사람도 있다. 출소를 앞둔 수감자나 길거리의 문제아들의 일자리 교육을 돕는 ‘스쿠니치협회’에서 하는 교육을 받고 얻은 일자리이다. 이 협회는 카페 소스페소 외에도 ‘피자가 주는 희망’과 같은 사업들을 하며 문제아들의 사회적응을 돕는다.

나폴리에서 시작한 카페 소스페소의 따뜻함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미국 뉴욕 등으로 번져나갔다. 한국에서도 ‘미리내 카페’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형태의 카페가 있었다. ‘미리 낸다’는 뜻으로 커피 혹은 음료를 마시고 다음에 찾아올 누군가를 위해 값을 미리 지불하는 곳이었다. 2013년 ‘미리내 가게’를 시작한 전북 군산의 ‘착한동네 카페’에선 아직까지 이런 연대가 이어져오고 있다. 착한동네 카페는 커피 외에도 미장원, 세탁소, 공예 외에도 인문학 강좌 등을 재능기부로 엮은 ‘미리내 네트워크’를 만들어 생활기부를 진행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벼랑 끝에 몰린 소상공인을 돕기 위한 최근의 ‘착한 선결제’ 캠페인도 이와 비슷한 사회적 연대일 것이다. 방법은 평소 이용해오던 음식점이나 카페에 들러 먼저 일정금액을 결제해두고 꾸준히 재방문을 하는 식이다. 금액이 크든 적든 선결제는 더 이상 돈 나올 곳이 없는 소상공인들로서는 위기 속에서 만나는 한줄기 희망의 빛이다. 각 시도 관공서와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번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SNS에서도 선결제 영수증 인증과 관련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대구경북 지역 소상공인들은 이제 견뎌내는 힘조차 버거울 정도다. 와중에 대구시가 식당, 카페 등의 영업시간을 오후 11시까지로 연장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형평성 경고를 받고 하루만에 오후 9시로 변경함으로써 이들은 더 힘들어졌다. 백지장도 맞든다는 심정으로 카페 소스페소이든 미리내이든 착한 선결제든 자영업자들을 도우는 따뜻함이 필요할 때다. 관공서나 공공기관 뿐 아니라 사회 곳곳으로 이같은 나눔이 커피 향처럼 은은하게 퍼져나가길 기대한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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