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재부 입 틀어막는 정치인들

발행일 2021-01-31 15:06:2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지난달 22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린 것은 정치인들이 재정을 화수분처럼 쓰려 하기 때문이다.

그 이틀 전 자영업 손실보상제와 관련해 김용범 기재부 1차관이 “법제화한 나라를 찾기 어렵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정세균 국무총리가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며 원색적으로 몰아붙였다. ‘코로나19로 벼랑 끝에 몰린 자영업자들을 돕자는데 무슨 말이 많으냐’는 것이다. 그는 여권의 유력 대권 후보 중 한 명이다.

기재부 때리기에는 대권후보 여론조사 선두에 선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가세했다. 그는 “(기재부가) 너무 건전해서 문제인 재정건전성을 지키겠다고, 국가부채 증가 내세우며 소비, 가계소득 지원을 극력 반대하니 안타깝다”고 주장했다. 이 도지사는 포퓰리즘 논란에도 불구하고 재난지원금 전국민 지급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주역이다.

코로나 피해를 입은 자영업자, 소상공인 지원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재원이 문제다. 기재부의 반발은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지출을 여권 정치인들이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의 제기하면 개혁 저항으로 몰아붙여

만만한 것이 공무원인가.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나 주무 부처의 입을 틀어 막아선 안된다. 협의의 장이 형성될 수 없다. 당연히 올바른 정책도 나올 수 없게 된다.

소신에 자리를 걸만큼 웬만큼 강단있는 관료가 아니면 정치인에 끝까지 맞서기 어렵다. 몰아세우기만 하면 그들은 입을 닫는다. 마음 속으로는 “그러면 이나라가 당신 나라냐”고 반발하면서. 전문 관료들이 외압 때문에 소신을 꺾으면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기재부를 찍어누르는 정치인들에게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고, 파급영향은 어디까지 미칠지 더 멀리 내다보고 고민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선심성 정책들이 앞다투어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단 법제화되면 되돌리기 어려운 국가 재난지원정책을 정치인들이 독단적으로 재단해서는 안된다.

코로나 사태 후 재난지원금 관련 논의에서 주무 부처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잦다. 지난해 5월 1차 재난지원금 때도 기재부는 선별 지급을 주장했지만 전국민 지급을 주장한 정치권에 밀리고 말았다.

결과는 KDI 분석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지급한 14조2천억 원 가운데 소비 증가로 이어진 금액은 4조 원에 그쳤다. 경기부양 효과는 약 3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대체 소비를 한 뒤 저축이나 빚을 갚는데 사용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때 피해가 큰 계층에 선별 지급을 했으면 재정투입 효과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선별-보편’ 지급 논쟁도 종식됐을 가능성이 높다. 첫 단추를 잘못 꿴 여파가 지금껏 이어지는 것이다.

대국을 보는 눈은 정치인들이 더 정확할 수 있다. 그러나 정책의 전후방 파급 영향을 따져보는 전문 관료들의 섬세한 판단도 중요하다. 홍 부총리의 말처럼 ‘그 길이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일 경우 더욱 그렇다.

---손실보상 법제화, 짚어야 할 사항 많아

논란이 일자 지난 25일 문재인 대통령이 교통정리에 나섰다. 문 대통령은 방역조치로 피해를 입은 자영업자 등에 대한 손실보상의 제도화를 주문했다. 다만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일정 범위”라는 단서를 달았다. 하루 뒤 정 총리는 손실보상제는 소급 적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 앞으로 닥칠 사태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법제화가 된다면 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방안이 도출돼야 한다. 재원 조달, 지급 대상·금액, 형평성, 법제화의 경직성 등 짚어야 할 사항이 한둘이 아니다.

코로나가 백신 접종으로 올 가을쯤 극복된다고 해도 감염병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전망이다. 주기적으로 찾아와 우리를 괴롭힐 가능성이 높다.

차제에 단기와 중장기로 구분해 고통입은 국민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권이 선거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시행착오가 없게 여유를 갖고 검토해 나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지국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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