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하고 약속이 있었지 되뇌며/ 모두들 떠나고 빈 잔만 남은 자리를 떠나/ 창가로 자리를 옮겨 나와 마주앉았다/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나와 마주앉아/ 의자를 당겨 봄비와 대화를 나누었다/ 창밖 길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여,/ 너희 둥근 얼굴이며/ 주룩주룩 동무되어 내려앉는 너희 몸동작이며/ 가장자리로 튀어 오르는 너희 눈웃음이며/ 모두가 아주 오래된 가슴속의 연인들처럼/ 어깨를 기대며 내리는 창밖에 서서/ 나를 오래 참고 기다려 주는 너희들/ 아주 고맙다/ 어느새 봄날 비 내리는 오후 저녁이 되었다/ 서로 얼굴도 모르고 내리던 빗방울 낯설어도/ 서로 악수를 하고 헤어지며 비는 계속 내렸다

「하늘 우체국」 (서정시학, 2015)

예순 살은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논어에선 귀가 순해진다고 해 이순(耳順)이라 표현한다. 인생에 경륜이 쌓이고 사리와 판단이 성숙해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나이라는 의미다. 또 예순 살은 육십갑자가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하는 나이다. 환갑, 인간의 수명이 육십 년이라는 함의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만 퇴직 연령도 예순 살이다. 실제로 예순 살이 되면 인생에 대한 소회가 남다르다. 시 ‘예순 살 즈음에’도 그런 차원이다.

어느 봄날 오후에 묵은 친구들과 만났다. 예전에 비해 먹고 마시는 양과 시간이 많이 줄었다.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젊을 땐 2차, 3차로 이어졌지만 이젠 앞장서서 깃대 잡는 사람이 없다. 떠들썩한 친구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식탁 위엔 어느덧 빈 잔만 남았다. 창밖엔 봄비가 내렸다. 창가로 가서 봄비를 보며 문득 깊은 감상에 젖는다. 바쁘게 살아온 날들을 회상한다. 봄비를 보며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봄비가 또 다른 나로 현신해 맞장구를 쳐준다.

봄비가 가슴 속에 묻어둔 옛 연인을 불러온다. 봄비 오는 날이면 좁은 우산 속에서 어깨를 감싸고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으면서 골목길을 걸었다. 창밖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가슴 속에 남아있는 옛 연인으로 변신한다. 봄비를 머금은 그녀 얼굴은 물 오른 수양버들처럼 싱그러웠다. 달덩이 같은 그녀 얼굴이 그립다. 봄비 내려앉는 품새가 부드럽다. 그녀의 그윽한 몸동작을 보는 듯하다. 가장자리로 튀어 오르는 빗물이 그녀의 눈웃음으로 번지고 상쾌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아름다운 옛 추억이 봄비 속에서 살아나온다. 연모하는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봄비는 창밖에 기대서서 지난날들을 찬찬히 보여준다. 어설픈 나를 참고 기다려 주는 봄비가 마냥 고맙다. 나 하나, 너 하나, 토닥토닥 추억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저녁이 됐다.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았지만 이젠 헤어질 시간이다. 헤어지고 나면 낯설지만 옛 연인과의 추억을 풀어준 봄비가 정겹다. 서로 악수를 하고 헤어졌지만 비는 계속 내렸다. 봄비의 심정도 시인의 마음과 같은 듯하다. 애써 남겨놓은 사연은 잊혀 질까봐 두려운 마음이리라.

봄비를 시적인 대상으로 끌어들여 인생에 대한 잠재적 회한을 시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봄비에 녹아있는 시적 상상력이 상큼하고 맑다. 삶에 대한 상흔을 치유하고 지난날의 회한을 씻어주는 기운이 전해온다. 의인화와 감정이입을 통해 자신과의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어내고 가슴 속 깊이 침윤해있던 감정을 자연스레 형상화시킨 서정시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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