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00>원효와 요석.<하>

발행일 2021-02-08 09:23:1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원효는 자신의 몸을 백 명으로 늘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경산시는 자양면에 경산 출신의 성현인 일연, 원효, 설총의 영정과 그들의 행적을 기려 삼성현문화박물관을 건립했다. 박물관의 원효대사 진영.


원효는 신라시대 경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주변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지혜를 선보였다.

일찍 화랑으로 전쟁터를 누비다가 승려가 돼 세상을 구하려는 공부에 빠져들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요석공주를 만나 시대의 문장가 설총을 낳고, 자신은 또 더 큰 세상을 위해 분황사, 황룡사, 고선사, 기림사를 거쳐 끝내 혈사에서 육신의 삶을 마감했다.

기림사에 머물 당시에 이미 그는 몸을 백으로 분신하는 재주를 지녔다.

그러다 더 큰 세상을 구하기 위해 혈사에서 수련하다 그대로 입적했다.

육신의 껍질만 남기고 그는 영원히 자유로운 몸이 됐다.

덕동댐을 건설하면서 국립경주박물관 옥외전시장으로 이전 복원한 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


◆삼국유사: 원효의 길

원효는 이미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에는 세속의 옷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다행히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민하여 경서와 역사에 두루 통달하니 신라의 현인 열 명 중 한 사람이 됐다.

설총은 방언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방풍속과 물건 이름에도 통달하고 사리를 깨달아 6경과 문학의 뜻을 풀었으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명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를 전수하고 있다.

원효는 우연히 광대들이 춤출 때 사용하는 큰 박을 얻었다. 그 모양이 진기해 그 형상에 따라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에 있는 일체 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구절에서 무애라 이름 짓고 이에 따라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읊으며 돌아오니 가난뱅이는 물론 산골에 사는 무지몽매한 무리들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됐다.

그들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읊게 됐으니 원효의 교화는 참으로 큰 것이었다.

기림사와 연접한 골굴사에 지금도 혈사의 흔적이 있다. 가장 깊이 패인 바위동굴로 관음전으로 불리는 골굴사의 혈사. 원효가 입적한 혈사로 추정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라 했다.

스스로의 이름을 새벽 원효라 한 것은 아마 부처님 광명을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벽 원효라는 이름도 역시 방언인데 그때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말로 원효를 새벽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편찬하던 중 제40 회향품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송사로 인해 몸을 1백 소나무에 나눴으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위계의 초지라고 말했다.

또한 바다용의 권유와 임금의 조서로 길가에서 삼매경소를 지었다.

그때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사이에 놓은 연유로 각승이라 했는데 이 또한 본각과 시각의 오묘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가 펄럭이며 와서 종이를 붙여 순서를 바로잡았는데, 원효의 마음을 알아 서로 뜻이 맞았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설총이 그의 유해를 부숴 그의 진용을 소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흠모해 극도의 슬픈 뜻을 표하였다.

설총이 곁에서 예배할 때 소상이 갑자기 뒤돌아봤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본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거처하던 혈사 근처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한다.

광유선승이 창건한 임정사와 석가모니의 기원정사 앞글자를 따서 원효가 중창한 기림사 전경.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효의 깨달음

원효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네 살에 벌써 사서삼경을 터득하고 마을에서 보이는 책이란 책은 모두 섭렵해 모르는 것이 없는 신동으로 통했다.

원효는 사람들을 거느리는 위치에 서고 싶었다.

호연지기를 감당할 수가 없어 무술을 익혔다.

서민의 위치에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는 길은 전쟁영웅이 되는 방법이 가장 빨랐다. 그래서 화랑이 돼 물 만난 승냥이처럼 눈에 불을 켜고 전쟁터를 누볐다.

원효의 활약은 눈부셔 금방 상관들의 눈에 들어 빠르게 승진했다.

그의 호탕한 성격과 뛰어난 실력 때문에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다. 그와 함께 하는 전쟁은 백전백승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상을 당한 이후 그의 생각은 크게 바꿨다.

세상이 모두 허무했다.

장군도 재상의 자리도 모두 부질없게 느껴졌다.

죽으면 그만인 세상에 무엇 하러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서로 죽이고 죽어 가는지, 자신이 왜 그렇게 전쟁터에서 칼을 휘둘렀었던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고뇌에 빠졌다.

경산 삼성현문화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원효의 석고상.


드디어 원효는 의상과 함께 고구려 보덕스님을 찾아가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기 위한 공부에 매달렸다.

당시 보덕스님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법문에 밝은 승려로 가장 이름이 높았다. 보덕에게서 5년을 공부한 원효와 의상은 신라에 걸맞은 자신들이 찾는 이념을 만족시켜줄 공부를 위해 고국인 신라로 돌아왔다.

원효와 의상은 신라에서는 더 배울만한 스승이 없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배우기로 하고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

도중에 원효는 해골의 물을 마시고, 다음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구더기가 득시글거리는 해골을 본 순간 원효의 마음은 환하게 밝아왔다.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속에 부처가 살고 있으므로 내가 바로 부처다.

스스로 부처라고 생각하는 순간 누구나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부처라고 생각하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원효대사가 기림사에서 항사사로 왕복하며 혜공스님과 문답으로 불교에 대한 공부를 넓혀갔다. 원효대사가 다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어사의 둘레길 대교.


방울장수도 부처요, 주막집 주모도 부처요, 나무꾼도 부처, 부랑자 거지도 부처다. 단지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내가 가르쳐준다면 백성들은 모두 부처가 되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원효는 미친 듯이 웃기도 하고, 혼자 울기도 하며, 노래를 부르다가 춤을 추며 길거리를 쏘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등을 치고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원효는 백성들의 삶 속에서 뒹굴면서 다시 고민이 찾아왔다. 나 혼자 행복하고, 나 혼자 부처가 되더라도 세상을 구할 수 없다.

모든 백성들이 부처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혼자 떠돌며 일러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원효는 결국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면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요석공주와 일가를 이룬다면 자신의 뜻을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낸 것이다.

오어사 일주문.


그 이후 원효는 분황사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많은 책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대승기승론을 비롯해 그의 생각이 붓끝에서 말 달리듯 쏟아져 나와 100여 종, 240여 권의 책을 써내려갔다.

원효는 책을 쓰면서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 있고, 그를 백성들에게 알려도 욕심을 앞세운 사람들의 권력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져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진실로 모든 백성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어 잘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또 고민에 빠졌다.

더 깊은 고민으로 온 백성들을 위한 실천적 학문을 익히기 위해 원효는 고선사로 자리를 옮겼다.

고요하게 깊은 토함산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길의 태동을 보며 고선사에서 참선에 들었다.

저잣거리를 떠돌며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유랑하던 원효의 자세가 돌변한 것이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만난 요석궁이 있었던 교촌마을.


세상사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화두에서 더 깊이 들어가 마음이 머무는 곳에 육신도 함께 머물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참선에 들었던 원효는 육천통의 실마리를 잡고 토함산 능선을 넘어 임정사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임정사를 크게 중창하고, 석가모니의 기원정사와 첫 글자를 따서 기림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원효는 기림사에서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고민에 빠졌다.

갖가지 방식의 참선과 이웃 항사사 혜공스님을 찾아가 문답으로 궁금증을 풀어보는 수행을 이어갔다.

그러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인도에서 온 광유선승이 득도한 흔적을 발견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던 끝에 육천통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천리 밖에서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경지를 체험하면서 더욱 수련에 매진했다. 원효는 드디어 육천통에 이르렀다. 천시통, 천후통, 천미통, 천촉통, 천이통, 천심통의 능력을 오롯이 갖게 됐다.

고선사지에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온 원효대사의 일대기를 적은 비석 받침.


원효는 시간을 거슬러 전생에 자신의 모습을 만나고, 다시 내세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 혈사에서 석 달 열흘을 벽만 마주하고 참선에서 들어 깨어나지 않았다.

영원히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이다.

이미 육신은 의미가 없는 껍질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무가 되고, 참새가 되었다가 토끼, 노루가 되는 것도 이미 마음만 먹으면 이루어지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직 혈사에 남은 것은 원효의 정신이 빠져나간 육신일 뿐이다. 영원을 사는 생명체가 돼 지금도 신라의 터를 부유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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