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과 빨랫줄」 (문학사상사, 1989)
설날 전후 탁 트인 들판이나 강가에서 연을 날렸다. 입을 것도 변변치 못해 벌벌 떨면서도 굳이 찬바람을 맞으며 연을 날렸다. 왜 하필 살을 에는 삭풍에 연을 날렸는지 궁금하다. 춥다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지 말고 찬바람에 맞서서 이겨내라는 뜻일까. 높은 하늘가에 춤추는 연과 밀고 당기는 맛에 빠져 추위를 잊어버렸고 떨어지는 연을 살리려고 얼레를 들고 뛰어다니면서 추위를 이겨냈다. 하지만 설날에 연 날리는 일은 이젠 아련한 추억일 뿐이다.
세배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굉장했다. 설날 당일은 가족에게 세배하고 그 다음날부턴 동네 어르신을 찾아 세배를 했다. 집집마다 출타를 자제하고 세배꾼을 기다렸다. 세배를 하고나면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내놨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배가 터질듯하고 주머니 마다 과자로 가득 채워졌다. 세배가 있어 설날이 행복했다. 작금의 세배는 돈을 주고받는 형식일 따름이다.
설 전날 밤 자면 눈썹이 센다고 자지 않으려 애를 썼다. 결국 잠이 들고 말았지만. 또 귀신이 찾아와 신발을 훔쳐간다는 속설이 있어 신발을 감춘다고 법석을 떨었다. 눈이 촘촘한 체를 벽에 걸어두면 귀신이 체 구멍을 센다고 정신이 빠져 신을 못 훔쳐간다고 했다. 구멍을 세다가 중간에 헷갈려서 처음부터 다시 세는 일을 되풀이하다가 날이 밝으면 혼비백산 도망간다는 우스운 이야기다.
설날은 이제 명목만 남았다. 차례마저 성가신 일이 됐다. 제꾼과 제수가 부담이고 가사노동은 뜨거운 감자다. 세배는 자식들에게 절 받고 세뱃돈 주는 행사로 전락했다.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등 세시풍속은 이벤트가 됐고, 복조리를 돌려서 학비를 마련하던 일은 흔적도 없다. 올핸 코로나로 인한 규제로 가족상봉마저 깨졌다. 조상을 생각하고 가족 간 유대를 다지던 설날의 미풍은 희미해지고 연휴의 의미만 남았다. 설날에 부모님 생각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시인이 반갑고 정겹다.
오철환(문인)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