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시욱
▲ 김시욱
김시욱

애녹원장

일을 마치기 바쁘게 집으로 퇴근한다. 코로나19가 만든 일상은 단조롭고 무기력하다. 코로나 확진여부에 대한 불신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접촉을 꺼려지게 한다. 정치, 사회면 기사를 대할 때면 여느 때보다 강한 분노를 터뜨리는 우리를 발견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인하고 엄마가 간난 애기를 유기해 사망에 이르게 한 뉴스 보도는 이젠 낯설지 않아 보인다.

단순히 쳐다본다는 이유로 30대가 60대를 무차별 폭행한 사건은 차라리 낯익은 풍경처럼 다가온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주체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연이어 터지는 스포츠계의 ‘학교폭력 기사’는 다른 업종으로 확산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생명 존중과 인권이란 단어는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방어기제로만 사용되는 듯하다. 유아와 성인의 생명가치를 다르게 재단하고 자신과 타인의 존재 가치를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가는 현실에서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더 저지(THE JUDGE, 2004, 미개봉)’란 영화를 접하게 됐다. 제목을 통해 흔한 법정 영화라 추측했던 내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실루엣처럼 흐르는 도입부 신문 위 안경, 야구선수 팀으로 구성된 액자와 구식 영상 녹화기, 탐스런 꽃을 가꾸는 중년여인의 모습이 다소 생소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것들은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소품이자 복선이었음을 이해하게 됐다. 단순한 법정 영화가 아니라 가족의 해체와 결속, 그리고 법적 갈등의 중심에서 가치관의 중심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시사한다.

승소율 100%의 능력과 재력을 겸비한 변호사 행크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가족’이다. 부인과는 이혼 직전이고 하나뿐인 아버지와는 연락을 끊고 산지 오래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으로 몇 십 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지만 부자간의 관계는 이미 회복불능처럼 보이는 어색하고 먼 사이다. 장례식 후 아버지는 식료품을 사기위해 차를 끌고 나가고 존경받던 판사에서 살해용의자로 바뀐다.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아들은 아버지의 변호를 맡게 되고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의 원인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범죄에 대한 시각적 차이는 판사와 변호사라는 부자의 직업적 관점에서도 판이하게 다르다. 더불어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갈등의 저변에 자리하는 또 다른 원인으로 자리한다. 대사 중 죽었을 때의 ‘성조기 조기 게양’은 존경받는 판사로서의 삶을 마감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명예를 상징한다. 말기 암으로 일시적 기억상실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기존의 판결들에 대한 무효라는 위험성과 무죄평결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증인 없는 재판에서 아버지는 스스로에게 불리한 고의성을 인정함으로써 배심원들의 유죄 평결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 마지막을 차지하는 아버지의 죽음과 조기 게양, 42년간 재직한 아버지의 법정을 돌아보는 아들의 모습은 많은 울림을 전한다. ‘나 여기 있어(I am here)’로 표현 되는 아들 행크의 마지막 대사는 자신의 뿌리와 중심이 가족과 고향임을 부르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의 가족 해체는 1990년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지속적으로 진행돼 왔음이 사실이다. 경제적 위기로 인한 가족 해체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없는 고통과 가족상실을 맞보게 했다. ‘홈리스의 가장’으로 대변되던 그 상황은 지금도 진행형인 상황이다. 대가족 중심의 경로사상으로 노인복지를 지탱해오던 한국 전통적 모습은 핵가족화와 노인문제가 대두하면서 붕괴의 길로 가고 있다. 가족의 해체는 노인복지 해체다. 노동시장에서의 조기 퇴출과 코로나19라는 새로운 리스크의 등장은 공원 곳곳에 모여 소일거리를 찾는 노인들을 양산하고 있다. 공공근로 자리를 찾지 못해 수레를 끌고 폐지를 줍는 노인들의 모습이 흔한 일상이 돼버린 지금 ‘고독사’는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나이든 부모를 공양하라 하기에는 실업과 부동산 문제에 휩싸인 청년들에게 가혹한 처사로 비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의 경제적 안위마저 힘겨운 현실에서 부모와 자식, 이웃 간의 유대는 꿈같은 이야기로 전락하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진정 가족의 중심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물질적 풍요만 쫓아온 사회적 구조는 가족의 중심이어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몰아내지는 않았는지 살펴봐야 한다. ‘금수저’를 물려준 부모만 부모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라 고집스럽게 ‘옳음’을 지켜온 가난한 부모 또한 이 시대의 부모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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