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03>승전법사와 갈항사 돌무더기

발행일 2021-03-01 11:57:2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갈항사 승전법사는 80여 개의 돌무더기를 상대로 불법을 강의

김천시 남면 오봉리 갈항사지에서 발굴돼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설 복원된 국보 제99호로 지정된 동서삼층석탑. 동쪽의 석탑 기단에 758년에 탑을 세웠다는 사실과 내력이 기록된 유일한 사례로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김천 갈항사는 신라시대 승전 법사가 창건했다는 기록이다.

지금은 사라진 절터에서 불상과 석탑 등의 문화재가 출토됐다.

동서삼층석탑은 일제강점기에 발견되면서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동서석탑 중 동쪽석탑 기단에 조성연대와 조성한 인물 등의 내용이 기록돼 금석문 등의 역사학계에 중요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석탑을 조성한 인물이 원성왕의 생모와 이모, 외삼촌 등 왕족과 관련된 중요 인물들이어서 신라시대 왕실에서 외부의 사찰에 대한 지원 내용까지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갈항사는 신라시대 창건돼 중요 사찰로 명맥을 이어오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천 오봉리 갈항사지는 과수원으로 변해 농민들이 농사를 짓고 있다. 동서삼층석탑이 발견된 곳에 국보 제99호 삼층석탑이 있었던 곳이라는 표지석만 남아있다.


◆삼국유사: 승전촉루 갈항사

승려 승전은 그 내력이 자세하지 않다.

일찍이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현수국사의 강석에 나아가 배웠다. 현묘한 말을 받아 미묘한 것을 연구하여 사색을 쌓았다.

보는 것이 슬기롭고 매우 빼어나 숨은 것을 깊이 음미해 찾고, 그 묘함과 깊음을 구하는 데 구석구석까지 진력을 다했다.

그는 인연 있는 곳으로 가 감응을 받고자 고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다.

처음에 현수가 의상과 함께 공부하면서 지엄화상의 자애로운 가르침을 모두 받았다.

현수는 스승의 학설에 따라 뜻을 여러 부분으로 기술했던 바 승전법사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편에 이를 보냈다.

의상도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한다.

별도로 봉한 서신은 이렇다.

‘탑현기 20권 중에 두 권은 미완성입니다. 교분기 세 권, 현의장 등 잡의 한 권, 화엄범어 한 권, 기신소 두 권, 십이문소 한 권, 법계무차별론소 한 권, 이렇게 모두를 승전법사가 간추려 베껴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지난번에 신라의 승려 효충이 금 9푼을 갖다 주면서 이것은 스님께서 보낸 것이라 했는데 비록 편지는 받지 못했으나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지금 서쪽 나라의 물병과 대야 한 개를 올려 작은 정성을 표하오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올립니다.’

김천 갈항사지와 연접한 곳에 현대에 지어진 절이 있다. 법당 앞에 두 그루의 감나무가 동서석탑처럼 나란히 서 있다.


승전법사가 돌아와 편지를 의상에게 전했다. 의상이 법장의 글을 펴보니 마치 지엄의 가르침을 귀로 듣는 것만 같았다. 수십 일 동안 탐구하고 검토해 문하의 제자들에게 주면서 이 글을 널리 펴게 했다. 이 말은 의상의 전기에 실려 있다.

이 글을 살펴보면 원만하고 융통한 가르침이 우리나라에 널리 퍼진 것은 진실로 승전법사의 공로이다.

그 후 승려 범수가 멀리 당나라로 가서 새로이 번역된 후분화엄경, 관사의소를 구해 가지고 돌아와 퍼뜨리고 가르쳤다.

이때가 기묘년(799)이었다. 이 또한 불법을 구해 널리 유포시킨 것이라 하겠다.

승전은 바로 상주 영내에 있는 개령군 지역에 절을 짓고 돌들을 제자로 삼아 화엄경의 강의를 열었다.

신라 승려 가귀가 자못 총명하고 불법의 이치를 알아 법통을 이어 심원장을 저술하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승전법사가 돌무더기를 데리고 불경을 논의하고 강연을 했으니 지금의 갈항사였다.

그돌 80여 개를 지금까지도 절의 주지가 전해 주고 있는데 자못 신령스러움과 신이함이 있었다.

그 밖의 사적들은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대각국사실록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김천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의 모습. 갈항사지 밭에서 발굴된 불상을 누각을 지어 보존·관리하고 있다. 신라 경덕왕 때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245호로 지정 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갈항사

경북 김천시 남면 오봉리의 갈항사는 신라시대 성덕왕 때 창건된 사찰로 처음에는 작은 절로 개창했지만 758년 경덕왕 대에 중창된 당시 중요사찰로 손꼽힌다.

갈항사는 임진왜란 당시에 불에 타 없어진 것으로 전해지지만 언제 폐사됐는 지 자세한 기록은 없다.

지금은 밭으로 변해 사찰의 흔적도 없는 갈항사지에서 주요 유적들이 나왔다. 일제강점기에 동서 삼층석탑이 발굴되어 경복궁으로 옮겨갔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오봉리 석조석가여래좌상을 안치하고 있는 보호각.


이 석탑은 국보 제99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석탑의 보존상태가 깨끗할 뿐 아니라 동탑의 기단석에 이두로 새겨진 명문이 있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기단석에 새겨진 내용은 신라 원성왕의 생모 계오부인과 이모, 외삼촌 등 3명이 758년에 이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원성왕의 외삼촌은 영묘사의 언적법사이다.

석탑이 발견됐던 김천 갈항사지에는 석탑이 있었던 곳을 표시하는 표지석 2기가 과수원 가운데 동서로 나뉘어 우뚝 서 있다.

갈항사지에서 발견된 오봉리 석조석가여래좌상은 얼굴부분을 빼고는 비교적 깨끗하게 보존된 상태다.

지금은 전각을 지어 보호관리하고 있다. 왼쪽 팔 일부가 일본인에 의해 부서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신라시대 석조유물로 보물 제245호로 지정됐다.

갈항사지와 북쪽으로 연접해 현대식 갈항사가 문을 열어두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갈항사의 돌

신라시대 갈항사의 승전법사는 한 번 기도에 들어가면 보통 10일씩은 물도 거의 마시지 않고 몰입한다.

법사가 기도할 때면 다섯 명의 비슷하게 생긴 건장한 신도들이 함께 기도하며 주변을 지켰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도 절을 방문하는 사람이 없는데 법사가 강의를 할 때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80여 명의 무리가 엎드려 함께 공부하고 염불을 외웠다. 그러다 흔적 없이 사라지곤 했다.

또 억울한 일이 있거나 간절한 소원이 있는 중생들이 가끔 갈항사를 찾아와 법사에게 하소연하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중생의 뒤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중생이 돌아보면 갈색 옷을 입고 기도하던 사람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중생이 따라가 이것저것 캐물으면 깨알같이 대답하며 소원을 이루도록 했다.

갈항사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석재들.


법사 옆을 지키는 갈색 옷을 입은 신도들은 갈항사 뒤를 에워싸고 있는 돌담의 돌들이었다.

갈색돌들은 밤이 돼 산짐승이 들어오려 하면 높은 담으로 변해 법당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막았다. 눈보라가 치면 또 법당을 울처럼 막아 초가지붕이 흐트러지지 않게 했다.

한번은 도적 10여 명이 깊은 밤을 틈타 떼로 몰려왔을 때 갈색옷을 입은 무장들이 하나같이 긴 창을 들고 법당을 에워싸고 지켰다. 도적들은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승전법사가 먼 길을 떠날 때는 돌담의 돌이 갈색옷을 입은 신도가 되어 뒤따르며 지켰다. 깊은 물을 건널 때면 갈색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법사의 발이 젖지 않게 했다.

갈항사의 돌담을 이루고 있는 돌들은 승전법사의 친구이자 함께 공부하는 도반이고, 그를 지켜주는 호법신이기도 했다.

현대 지어진 갈항사의 동종과 종각.


갈항사에서 기도를 올린 사람들의 기도는 한가지 소원은 꼭 이뤄졌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면서 갈항사를 찾는 신도들의 발길이 하나둘씩 늘어나 원성왕 때에는 인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 됐다.

그러나 승전법사가 입적한 이후로는 갈색돌담을 이루던 돌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해 몇 해가 지나 모두 없어져 버렸다.

승전법사의 고향은 어디인지 언제 입적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부석사 의상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갈항사를 창건하고 돌무더기와 공부하며 법화경을 강론했다는 설만 전해지고 있다.

승전법사 이후 갈항사는 원성왕의 친어머니 삼남매가 동서 삼층석탑을 세우고, 황금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을 중창하면서 더욱 번창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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