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진
▲ 김상진
김상진

수성구립용학도서관 관장

‘용학이네 사람책방에 사람책을 모십니다.’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에 자리한 용학도서관 주변에 내걸린 현수막의 내용이다. ‘용학이네 사람책방’은 용학도서관에서 운영되는 ‘사람도서관’의 이름이다. 사람도서관은 ‘사람책’으로 구성된 도서관이다. 사람이 책과 마찬가지로 콘텐츠를 담고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신개념 도서관이다. 사람책은 종이책이나 전자책과 마찬가지다. 도서관 안에서 읽을 수도 있고, 도서관 밖으로 빌려가서 읽을 수도 있다는 개념이다.

사람도서관의 기원을 찾아보면 2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덴마크의 사회운동가인 로니 에버겔(Ronni Abergel)이 2000년 덴마크에서 열린 한 뮤직페스티벌에서 이벤트로 시도한 것이 시초다. 이용자가 원하는 사람을 빌려주는 프로그램인 ‘Living Library(살아있는 도서관)’가 그것이다. 당시 덴마크의 청소년폭력방지 비정부기구(NGO)에서 활동하던 그는 사람책을 통해 소통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사람들 사이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허물기 위해 사람도서관을 시도했다고 한다.

에버겔은 2014년 국회도서관과 희망제작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 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살펴보면 그는 친구 네 명과 함께 사람도서관을 고안했다. 목적은 일상적이지 않은 종교, 성적 취향, 인종, 직업 등을 가진 사람책을 통해 편견과 선입견을 없애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사람도서관은 동성애자, 무슬림, 이민자 집단 등 사회적 소수자들과 지역사회 시민들 사이의 벽을 무너뜨림으로써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고, 갈등을 해소해 사회통합에도 기여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1993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파티에 가던 자신의 친구가 칼에 찔려 숨진 뒤 ‘스톱 더 바이올런스’란 비폭력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사소한 싸움에 휘말린 친구가 왜 그렇게 무참히 죽어야 했는지, 극단적인 범죄를 막으려면 사회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 해결책으로 고안한 것이 바로, 사람도서관이다. 갈수록 다원화되는 사회가 안고 있는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와해된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한 시민운동으로 시도한 것이다.

용학이네 사람책방은 에버겔의 의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람책이 거대 담론을 거론하기보다, 내 이웃과 소통하고 경험이나 삶의 지혜를 나누도록 유도함으로써 지역공동체를 강화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나누고 싶은 지혜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별, 나이, 직업 등과 관계없이 누구나 사람책으로 등록할 수 있으며, 한 달 단위로 사전에 안내되는 사람책을 만나고 싶은 주민은 누구라도 매주 금요일 오후 4시30분 용학도서관을 찾으면 된다. 사람책을 직접 만나지 못한 이들은 유튜브 용학도서관 채널에 업로드된 영상콘텐츠를 통해 사람책을 만날 수 있다. 사람책 영상은 2019년부터 제공되고 있다.

유명인도 아닌 보통사람의 이야기를 누가 듣겠느냐는 우려가 없지 않았지만,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대면 모임이 불가능한 때를 제외하고는 2018년 6월부터 지금까지 쉼 없이 매주 진행되고 있다. 이때까지 평범한 이웃 100여 명이 재능나눔 시민운동 차원에서 사람책으로 등장해 지역주민들과 소통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20~40명씩, 사회적 거리두기 1.5단계가 유지되는 요즘은 15명 안팎의 주민들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사례는 감사장과 자그마한 기념품뿐이지만, 대부분 사람책은 이웃과 소통하면서 보람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용학이네 사람책방에 앞서, 용학도서관에서는 ‘청출어람 청어람’이란 사람도서관이 운영됐다. 2016년 3월부터 다섯 학기 동안 진행된 청출어람 청어람은 매주 한 차례 인근 중학교 재학생을 대상으로 진로 및 직업 정보를 제공하는 재능나눔 사람도서관이었다. 당시 자신의 직업을 안내할 자원봉사자를 모집하자, 100여 명이 선뜻 동참했다. 매 학기 초 사람책과 직업, 일정을 인근 학교에 안내하면 학급이나 동아리 단위로 참여하기도 하고, 해당 직업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도서관을 찾았다. 가끔 사람책을 지역 학교에 대출하기도 했다.

사람도서관이 수년째 지속되는 힘의 근원은 대화다. 사람책이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지역주민들과 평범하지만 가치 있는 삶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지역주민이 청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책으로 등장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지역사회 주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웃에게 풀어내는 사람도서관을 통해 지역공동체가 강화되길 소망한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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