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중지왕(花中之王)

발행일 2021-04-11 15:31:3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먼 산봉우리가 깨끗하게 눈앞에 다가선다. 맑고 고운 봄날이다. 햇살 가득한 양지쪽 정원에는 작약이 큼직하고 화려한 꽃을 자랑하며 벌써 피어나 오월처럼 일렁인다. 두려움에 떨면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이를 위로 하려는 듯, 선별 진료소 뒤편에 서서 풍성한 ‘부귀화’가 여기에서 당신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다고 속삭인다. 지난봄, 우울하기 그지없던 그때에도 하염없이 피어나 있지 않았던가. 자연은 변함없이 다시 돌아와 그때 그 빛과 향기로 자리를 지키며 본분을 다하고 있다. 아무리 힘들고 지치더라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향이라는 ‘국색천향’ 모란의 향을 즐겨볼 일이다.

모란은 예로부터 화왕(花王)이라고 해 꽃 중의 꽃으로 꼽았다. 중국 유일의 여 황제였던 당나라 측천무후는 어느 겨울날, 꽃나무들에 당장 꽃을 피우라고 명령을 내린다. 다른 꽃들은 모두 이 명령을 따랐으나 모란만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래서 불을 때서 강제로 꽃을 피우게 하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없이 끝나자 화가 난 황제는 모란을 모두 뽑아서 낙양으로 추방해버렸다. 이후 모란은 ‘낙양화’로도 불렸고, 불을 땔 때 연기에 그을린 탓에 지금도 모란 줄기가 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모란은 자그마한 꽃나무다. 아름답고 화려한 모란은 꽃의 대표 자리를 차지했고 목단, 부귀화라고도 불린다. 오래전부터 화단이나 정원에 관상용으로 심었다. 꽃이 풍성하고 아름다워 과거에는 ‘꽃 중의 왕’이란 뜻의 ‘화중지왕’ 혹은 ‘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향’이란 뜻의 ‘국색천향(國色天香)’ 등으로 불렸다. 자그마한 나무가 검은 가지에 자색의 꽃을 올해도 잔뜩 단 모습을 보니 참으로 대견하다.

지난봄, 어느 새벽 모습이 떠오른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에 할아버지 한 분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서 모란 나무를 이리저리 살피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자초지종을 여쭤보니, 코로나19로 병원이 폐쇄되면 모란이 말라서 죽어버릴 것 같아 얼른 옮겨 다른 데 심어 잘 키워보겠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세상에나, 모란을 얼마나 사랑하면 그러실까. 해마다 탐스럽게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세월 보내기를 낙으로 삼았는데, 코로나가 덮쳐 그 꽃을 더 볼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부리나케 달려오신 모양이었다. 선별진료소 앞과 뒤를 가득 메우는 사람들도, 코로나란 녀석도 두렵지 않고 오로지 꽃나무만 눈에 들어오신 게다. 어르신의 간절한 눈빛을 보면서 다짐했었다. 코로나는 머지않아 끝날 것이고 다시 꽃은 피어날 것이니 봄이 되면 다시 같은 자리에서 뵐 수 있기를….

삶에 지칠 때, 자신만의 이상향을 꿈꾸게 되는 것 같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평생 사랑했던 땅 ‘월든’처럼 마음속 유토피아를 상상만 해도 아늑해진다. 소로는 하버드 대학 시절에도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홀로 사색에 잠기고 책 읽기를 즐겼다고 한다. 조용한 삶을 택했던 소로는 자신이 다른 하버드졸업생들처럼 되지 못하고 가정교사나 연필 제조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다른 이들이 불쌍히 생각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자연을 관찰하고 숲속을 산책하면서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을 느끼고 배우고 일구는 삶을 직업으로 삼았다. 익숙한 일상을 버리고 월든 호수로 떠나 오로지 자기 일에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땅을 직접 갈아 감자와 완두콩, 순무를 심었다. 종일 일하기보다 새벽 5시에서 정오까지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산책과 글쓰기, 명상 등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했다. 소박한 농사꾼이자 조용한 수행자의 삶을 그는 사랑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적게 걱정하고 크게 만족했다. 월든 호수의 갈대 사이에서 속삭이는 바람 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행복했다. 호수에서 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할 일은 넘친다고 생각했고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지극한 내면의 희열을 느꼈다. 고향에 머무는 재능이 있는 사람, 멀리 떠나지 않아도 바로 그곳이 천국임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평생 고향에 머물러도 세상 모든 곳을 여행하는 듯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혜안, 단조롭게 보이는 자연 속에서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마음의 눈. 그것이 소로의 지혜였다.

완전히 자신의 의도대로 살아보기 위해 평생 애썼던 소로, 마침내 죽음을 맞이할 때 깨닫지 않았으랴. 내가 헛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을. 농사와 명상을 결합한 삶, 낚시와 글쓰기를 병행하는 삶, 자연 일부로 완전히 동화되는 소박한 삶, 봄이 무르익는 이 즈음이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부러워하는 이들도 많으리라.

화중지왕 옆에서 이상향을 찾아 즐길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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