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10>광덕과 엄장

발행일 2021-04-19 10:50:5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광덕과 엄장 원효대사의 정관법으로 부처가 돼



선덕여왕이 지었다는 분황사. 황룡사와 연접해 있으면서 황룡사가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사찰이었다면 분황사는 일반 백성들을 위한 절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분황사에는 모전석탑과 석정, 화쟁국사비 등의 문화재가 있다.


광덕과 엄장은 신라시대 평범한 백성이자 분황사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살며 도를 깨우치려 노력하는 친구이자 승려이기도 했다. 결국 두 친구는 열심히 도를 닦아 극락으로 가는데 성공했다.

이들이 극락으로 가는 일은 광덕의 처이자 나중에 엄장의 처가 됐던 보살의 덕이 컸다고 해야겠다.

두 친구의 부인이 되었던 여인은 광덕과 엄장이 불도를 닦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현신했던 부처였던 것이다.

당시 엄장은 친구 광덕이 먼저 극락세계로 올라간 것에 충격을 받아 더욱 정진하게 됐는데 그 정진하는 방법을 원효대사에게서 배웠다.

원효대사는 거리에서 무애춤을 추었던 거리낌 없는 행동으로 일반 백성들 틈에서 자유롭게 떠돌아다니기도 하며 대중불교의 뿌리를 내리게 한 공신이라 해야 한다.

원효는 여러 고승을 찾아다니며 공부했지만 당나라 유학도 하지 않았으며 혼자 스스로 공부하며 깨우친 성인 반열에 올랐던 스님이다.

분황사에 주석하며 100여 종 300여 권의 책을 쓴 원효대사의 공덕을 이제는 새로운 각도에서 인정해야 한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분황사 모전석탑. 3층 형식으로 복원됐지만 당초에는 9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유사: 광덕과 엄장

문무왕 대에 광덕과 엄장이라는 승려 두 명이 서로 친해 밤낮으로 약속하기를 극락으로 먼저 가는 사람은 반드시 서로 알리도록 하자고 했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마을에 숨어 살면서 신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처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화전농사를 지었다.

어느 날 해 그림자가 붉게 노을지고 소나무 숲 그늘에 어둠이 깔릴 무렵에 창 밖에서 소리가 들려 오기를 “나는 이제 극락으로 가네. 자네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게나”라고 하자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서 쳐다보니 구름 위에서 하늘의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밝은 빛은 땅까지 뻗쳤다.

이튿날 광덕의 처소로 가보니 광덕은 과연 죽어있었다. 이에 즉시 광덕의 처와 함께 유해를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다.

장사를 다 치르고 광덕의 부인에게 말하기를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 어떠하오?”고 물으니 부인이 “좋습니다”라고 답했다.

분황사 모전석탑 1층 몸돌 4면에는 모두 석실을 만들어 부처를 안치하고, 앞에는 두텁게 양각한 두 구의 금강역사를 배치하고 있다.


드디어 머물러 밤에 자면서 정을 통하려고 하자 부인이 응하지 않으면서 “스님께서 서방정토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고 말했다.

엄장이 놀라면서 괴이하게 여겨 묻기를 “광덕도 이미 그랬는데 나 또한 어찌 안 되겠소?”고 이야기했다.

부인이 말하기를 “남편은 10년을 살아도 아직까지 하룻밤도 한자리에 잔 적이 없는데 하물며 몸을 더럽혔겠소. 오로지 매일 밤마다 몸을 단정히 하고 반듯이 앉아서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혹은 16관을 짓고 관에 익숙하자 달빛이 창문 안으로 들어오면 때로는 빛 위로 올라가 그 위에서 가부좌를 했습니다. 정성을 다함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에 가려고 아니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무릇 천 리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첫걸음부터 알 수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의 관은 동쪽으로 간다고는 할 수 있지만 서방으로 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며 단호히 말했다.

엄장은 부끄럽고 무안하여 물러나와 그 길로 원효법사의 처소로 가서 도 닦는 요점을 간곡하게 청했다. 원효는 정관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엄장은 이에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한마음으로 도를 닦으니 그 또한 서방정토로 올라가게 되었다.

정관법은 원효법사본전과 해동고승전에 실려있다.

광덕의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계집종이니 대개 관음보살의 19응신 중의 한 분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을 지키는 사자는 동서남북에 배치했는데 사자와 물개 등의 동물을 수호신으로 세워 특이하다.


◆분황사의 원효대사

신라시대 대중불교 확산을 위해 노력했던 원효대사는 진평왕 39년인 617년 경산에서 태어났다.

원효의 성은 설, 아명은 서당, 신당으로 불렸다. 법명 원효는 새벽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불교를 빛나게 한다는 뜻으로 스스로 지었다.

15세에 출가해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라 부르고 있으며, 태어난 곳에는 사라사를 세웠다.

원효는 진덕여왕 2년(648년)에는 황룡사에 주석하기도 했다.

원효는 낭지와 혜공 등에 불법을 배우기도 했고, 의상과 당나라 유학을 떠나던 길에 깨달음을 얻어 다시 신라로 돌아와 일심과 화쟁사상으로 불교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분황사에 주석하며 100여 종 240여 권의 책을 써 불교 사상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분황사에는 원효가 주석하고 있었다. 고려 숙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효를 내려 명종이 화쟁국사비를 분황사에 건립했다. 지금 비는 멸실되고 비를 세웠던 비석대좌가 남아 있다.


원효는 한국불교사상 발달에 기여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해동보살, 해동종주라고 불리기도 했다. 고려 숙종이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원효의 사상은 중국의 법장과 징관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요석공주와 설총 낳고, 떠돌며 소성거사, 복성거사로 불리며 불교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박으로 무애를 만들어,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고 설파했다.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쳐 백성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됐다.

원효는 지금은 댐에 수몰된 고선사에 머물기도 했으며, 686년 신문왕 6년, 3월30일 혈사에서 70세 일기로 입적했다. 아들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했다.

후손 설중업이 김언승 각간(후에 헌덕왕)의 도움으로 고선사에 서당화상비를 세웠는데 비석의 일부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원효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송고승전 등에 전하고 있다.

분황사 보광전은 삼차에 걸쳐 중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지금의 보광전에는 높이 3.45m의 청동으로 만든 약사여래입상이 있다. 원래 분황사의 약사여래불은 30만6천700근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이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광덕과 엄장

광덕과 엄장은 어릴 때부터 같은 마을에서 함께 자란 친구다. 둘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는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둘은 원효대사가 “모든 일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 누구나 관세음보살을 외기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극락에 가기 위해 불교에 대해 공부하기로 다짐했다.

광덕은 분황사의 북쪽에서, 엄장은 분황사의 남쪽에서 각자 암자를 지어 생업도 뒤로하고 불도에 전념했다. 그들은 오일장날에 시장에서 만나 수양에 대한 방법과 진전에 대해 논의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의 국밥집 여주인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끼어들어 “극락에 가시려면 전념해야 할텐데 제가 두 분 중 어느 분의 아내가 되어 시중을 들고 싶어요”라며 아내가 되겠다고 했다.

두 친구가 서로 양보하며 눈치를 봤다.

여주인이 거듭 독촉하자 광덕이 흔쾌히 “제 아내가 되어 뒷일을 봐 주신다면 염치불구 하고 허락하겠네”라며 제안을 받아들여 그날로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는 경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구황동 당간지주가 있고, 넓은 공터가 있어 경주시가 보리밭, 황화코스모스 등의 꽃밭으로 가꾸고 있어 새로운 볼거리가 되고 있다.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의 당간지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두 친구는 그 자리에서 축배를 들고, 더욱 불법에 정진하기로 약속했다. “누구든 부처가 돼 극락세계로 가면 서로 연락을 하자”고 맹세하고는 시장에 나오는 시간도 아껴 수도하기로 했다.

그날부터 광덕은 아내가 주는 죽으로 연명하며 밤을 낮삼아 기도하는데 전념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나도 진전이 없는 것 같아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내는 말없이 웃더니 분황사 원효대사를 찾아가 방법을 물어보라고 언질했다.

광덕은 바로 원효대사를 찾아가 아무래도 기도법이 잘못됐는지 진전이 없어 왔다며 방법을 물었다. 원효는 그가 쓴 ‘정관법’이라는 책을 전해줬다.

그로부터 날로 정진해 광덕은 어느날 밤 몸에서 사방으로 빛을 발하며 공중으로 부양하더니 지붕 위를 한바퀴 돌고는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그날 엄장의 꿈에 친구가 나타나 “나는 극락으로 가네. 자네도 곧 따라오게”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분황사 뜰에는 아직도 많은 석재들이 남아 있고, 보광전 동쪽에 연유를 알 수 없는 훼손된 작은 석불입상이 있다.


엄장은 다음날 바로 광덕의 집으로 찾아갔다. 광덕의 아내가 엄장을 맞아 “그이는 어제 극락세상으로 갔어요”라며 장례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엄장이 자초지종을 묻자 “분황사 원효대사에게서 기도법을 배워와 정진하더니 날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엄장도 친구의 장례를 치르고는 바로 분황사로 달려가 원효대사에게 기도법을 가르쳐주길 졸랐다.

그로부터 엄장도 집을 버리고 따라온 광덕의 아내 도움을 받아 기도에 정진해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처럼 극락세계로 날아갔다. 그 이후 광덕과 엄장이 기도하던 암자에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닮은 불상이 앉아 있었고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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