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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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왕관 모양의 꽃을 보니 탄성이 절로 난다. 두꺼운 녹색 잎사귀는 마치 칼처럼 뾰족하다. 연보랏빛 꽃송이의 튤립이 고고하게 솟아 올랐다. 어느 해 봄, 화살나무로 경계를 이룬 이웃집에서 건네준 구근 몇 개를 심었더니 다시 봄이 왔음을 알린다.

시골 나무 시장에서 사다 심은 영산홍은 비실비실하더니 이젠 제법 화사하게 꽃피어 자리를 빛낸다. 집 방문자들이 들고 와 심었던 꽃 잔디도 질긴 생명력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진분홍으로 검은 돌 마당에 봄을 색칠한다. 치자는 큰 나무 그늘에 가려서도 진한 향기로 하얀 꽃의 존재를 찾아보게 한다. 눈부신 4월이 말없이 지나간다. 코로나19가 끝났다면 마음 놓고 봄을 즐기련만,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노을이 아름다워도 그것을 마음껏 즐기기엔 무거운 납덩이가 한구석에 들어 있는 듯, 기분은 어쩔 수 없다.

꼭 해야 할 일만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사회생활을 오래 했으면서 조금이라도 역할을 찾아서 하면 좋지 않을까. 여기저기 몸과 마음을 보태기로 노력한다. 그중에 의사회 봉사단이 있다. 외국인 유학생, 이주 노동자, 불법체류자 등 몸이 아프지만, 의료의 도움을 받기 쉽지 않으면 의사회에서 하는 무료 휴일 진료를 지원했다. 코로나19가 심해지자 그곳도 문을 닫았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오갈 데가 없고 이전에 오던 사람들은 나에게 안타까움을 호소한다. 마음이 늘 불편하던 차에 응급실 야간에 근무할 기회가 생겼다. 10일에 한 번 정도 밤샘 근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해 낮 근무를 마치고 이어서 응급실 밤 당번을 했다. 주말이 되면 갖가지 사연의 환자들이 찾아와 온갖 인생살이의 교훈을 전한다.

2박3일째 울기만 해 달랠 수가 없어 왔다는 신생아, 배를 살살 만져주고 관장해줬더니 금세 울음을 그친다. 기르는 반려견이 여러 지병을 앓아서 주사 놓다가 바늘에 깊이 찔려 찾아온 이, 손가락 끝이 부어오르고 쑤셔댄다며 울상이다. 얼른 치료하고 마음마저 안심 시켜 줬다. 코로나19 밀접 접촉자가 돼 오랫동안 집안에 누워만 있었더니 갑자기 허리통이 생겼다며 119를 타고 온 중년, 근본적인 원인과 치료까지 원하지만, 코로나 상황에서는 통증이라도 조절하고 견딜 수만 있다면 자가 격리 후에 자유롭게 검사와 치료해야 하지 않겠는가 설명하고 설득하는데 밤이 깊어간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조금 완화되자 동네마다 술을 먹는 술 골이 성황인 모양이다. 갓 대학생이 된 아이들이 시험 끝나자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못 이겨 술집으로 달려가는가 보다. 주량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친구들과 분위기에 맞춰 입안으로 술을 들이붓다가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119에 실려 오기 일쑤다. 이제 겨우 성인이 되는 생일날 아이가 실려 왔다. 말끔한 옷에 토사물 범벅이다. 친구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무런 연락처도 없이 길가에 쓰러진 친구들은 정말 난감하다. 정신을 못 차리니 어떤 일 있었는지 알 수 없고 혹시나 나쁜 상황이라도 생기면 연락할 보호자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밤새 노심초사하는 일도 생긴다.

하얀 바지 차림의 학생은 불러도 대답이 없다. 가든파티 가방만 팔에 꼭 낀 상태로. 같이 온 친구가 알려준 번호로 보호자에게 전화하니 그는 먼 타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면서 한밤중에 달려 올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검사해보고 이상이 없고 의식이 깨어나면 혼자 자취방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것이 아닌가. 어쩌랴. 멀리서 한밤중에 달려올 수 없다고 하니. 씁쓸한 마음이 돼 멍하니 있다가 환자를 보면서 들락거리고 있으려니 한 시간쯤 지나서 보호자가 병원 응급실을 향해 출발한다고 연락이 왔다. 두 시간도 넘게 걸리는 거리라고 한다. 불안한 얼굴로 아이 보호자가 찾아왔다. 결과를 듣고는 아이 옆에서 깨어나기만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일어선다. 다시 직장에 출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밤새 거리를 달리다가 새벽 출근을 나가는 부모, 그 마음을 자식이 알아주어야 할 텐데…

퇴근하니 하늘 빛 가든파티 가방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명품 에르메스 가방 가든파티인가 놀라니 생일 선물로 왔다는 것이 아닌가. 직장인 취미 교육으로 가죽 공예를 배운다 던 제부. 수업 내내 만들어서 생일 선물한 것이란다. 어느 가수 남편이 선물하면서 화제를 모았던 명품이다. 그가 아내를 위해 가방을 사주려고 30만 원씩 달마다 넣는 1년짜리 적금을 부었다고 방송에서 자랑했단다. 그를 보고 “바로 저거야” 싶었다는 제부, 그 마음이 참으로 고맙다.

백신으로 어서 빨리 코로나가 끝났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가든파티 가방을 만들어준 제부와 여러 고마운 이들과 허브 향 부침개 구워 먹으며 이야기 나누는 가든파티 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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