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11>경흥이 문수보살을 만나다

발행일 2021-04-26 10:03:1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백제 출신 경흥대덕 문무왕이 알아보고 중책 맡겨

경주시 성건동 시가지에 보물 제127호로 지정된 삼랑사지 당간지주가 넓은 광장에 우뚝 서있다. 일반적인 당간지주와 다르게 외형을 날렵하게 굴곡을 주어 조각했다. 경흥은 신문왕이 국로로 책봉하고 삼랑사에 머물게 했는데 백제 출신으로 통일신라 초기에 상당한 견제를 받은 듯하다.


경흥은 백제 출신으로 18세에 승려가 돼 모든 불경에 통달해 명망이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경흥을 이미 불경에 통달해 신문왕이 국로로 책봉했다고 소개하면서도, 관음보살과 문수보살에게 가르침을 받는 우매한 백성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국로에 책봉된 최고의 스님이면서도 스스로의 심화에 빠져 병이 들었는데 변신한 부처의 치료를 받아 회복하는 이야기를 소개해 사학자들은 백제인이 통일신라 왕실에서 겪는 고충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경흥의 화려한 생활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신라사람들이 그를 책망해 비난하는 시류를 은유한 삼국유사의 지적이 적나라하다는 분석이기도 하다.

삼국시대를 지나 통일신라시대에까지 이름을 떨친 경흥국로의 깨우침을 통해 삼국유사가 추구하는 시대상을 읽어본다.

삼랑사지는 형산강변 도로와 연접해 넓은 광장에 잔디와 야생화가 어우러져 봄꽃동산을 이루고 있다.


◆삼국유사: 경흥이 문수보살을 만나다

신문왕 대의 경흥대덕의 성은 수씨이며 웅천주 사람이다. 나이 열여덟에 승려가 돼 모든 불경에 통달하니 그 시대에 명망이 높았다.

개요 원년(681년)에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려 할 때 신문왕에게 뒷일을 부탁하기를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내 명을 잊지말라”고 했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국로로 책봉해 삼랑사에 머물게 했다.

경흥이 갑자기 병이 들어 한 달이나 아팠다.

한 여승이 와서 그에게 문후를 드리면서 화엄경 중에 착한 벗이 병을 고쳐준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지금 법사님의 병은 근심으로 생긴 것이니 즐겁게 웃으면 치유될 것입니다”라 하고는 열한가지 모습의 익살스런 춤을 추는 광대를 만들었다. 뾰족하기도 하고 깎은 듯도 해 그 변하는 모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너무 우스워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법사의 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씻은 듯이 나았다. 그러자 여승은 문을 나서서 바로 남항사로 들어가 사라지고 여승이 가졌던 지팡이는 십일면원통상을 그린 불화 앞에 있었다.

삼랑사지 당간지주 보호철책 안에 석탑 상륜부의 지붕돌과 석재를 모아두고 있다.


어느 날 경흥이 왕궁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시종하는 이들이 동문 밖에서 먼저 준비를 하는데 말과 안장은 매우 화려하고 신발과 갓 또한 제대로 갖췄으므로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길을 비켰다. 이때 행색이 초라한 한 거사가 지팡이를 짚고 등에 광주리를 지고 와서는 말에서 내릴 때 밟는 디딤돌 위에서 쉬고 있었다. 광주리 속에는 마른 물고기가 보였다.

시종하는 자가 그를 꾸짖기를 “너는 스님의 옷을 입고 어찌 더러운 물건을 짊어지고 있느냐”라고 말했다.

승려가 말하기를 “두 다리 사이에 산 고기를 끼고 있는 자도 있는데 시장의 마른 물고기를 지고 있는 것이 무슨 흉이 되랴?”라고 하자 일어나 가버렸다.

경흥이 막 대문을 나오다가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의 뒤를 쫓게 했다. 그는 남산 문수사의 문밖에 와서 광주리를 버리고 사라졌다. 그의 지팡이는 문수보살상 앞에 세워져 있었으며 마른 고기는 바로 소나무 껍질이었다. 따라갔던 사람이 와서 이 사실을 보고했다.

삼랑사지와 연접한 인근 주택가에 신라시대 건축물에 사용되었을 석재와 석탑부재 등이 조경석과 화단 등에 쓰이고 있는 모습이 흔하게 보인다.


경흥은 이를 듣고 탄식하며 “문수보살이 와서 내가 말 타는 것을 경계한 것이구나”라고는 그후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말을 타지 않았다.

경흥의 아름다운 덕행과 그가 남긴 뜻은 승려 헌본이 지은 삼랑사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다. 언젠가 보현장경을 봤더니 거기에서 미륵보살이 말하기를 “내가 내세에는 마땅히 염부제에 태어나 먼저 석가의 말법제자들을 득도시킬 것이다. 다만 말 탄 승려만은 제외시켜서 부처님을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라 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할 것인가!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옛 성현이 남긴 교훈 뜻이 더욱 많은데/ 어찌하여 후손들은 갈고 닦지 아니하는가/ 마른고기 등에 진 건 오히려 괜찮으나/ 후일에 미륵불 문책 어찌 감당할까.’

삼랑사지와 연접한 인근 주택가에 신라시대 건축물에 사용됐을 석재와 석탑부재 등이 조경석과 화단 등에 쓰이고 있는 모습이 흔하게 보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문무왕과 경흥대덕

문무왕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무열왕을 따라 전쟁터를 누볐다. 특히 문무왕은 외삼촌 김유신 장군에게서 검법과 병법을 철저하게 공부했다.

문무왕은 전쟁터를 누비면서 백성들이 창과 칼, 활에 맞아 죽은 체 장사도 지내지 못한 시신이 빨래처럼 논두렁과 밭두렁에 널려 있는 모습을 보고, 반드시 전쟁을 없애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전쟁을 없애기 위해 더욱 전쟁을 혹독하게 치렀다.

그래서 문무왕은 왕이 되기 전인 장군으로 전장을 누빌 때부터 군사는 물론 일반 백성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겼다.

군사들이 전쟁에 이겨 적의 땅을 지날 때에도 함부로 부녀자와 어린이, 노인 등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음식과 곡식도 약탈하지 못하게 군기를 아주 엄하게 다스렸다.

문무왕이 백제를 쳐서 흡수 통일하고, 고구려와 힘겨운 전쟁을 벌릴 때였다. 지친 군사들을 이끌고 공주지역에 주둔하고 있는데 후방에서 군수물자 보급이 늦어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민가를 약탈하거나 탈영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조짐이 보였다.

삼랑사지와 연접한 인근 주택가에 신라시대 건축물에 사용됐을 석재와 석탑부재 등이 조경석과 화단 등에 쓰이고 있는 모습이 흔하게 보인다.


그때 문무왕은 술과 음식을 훔쳐먹은 군사들을 색출해 주민들과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재판을 열어 곤장 백대를 치고, 열흘동안 막사와 마을 청소를 담당하게 했다.

다음부터 다시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참하겠다는 엄한 규칙을 발표했다.

이어 문무왕은 성의 안팎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모아 군인들과 함께 성을 보강하는 공사에 참여하게 해 서로 화합하는 한편 군인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또 굶는 이들이 없도록 주민들의 곡식과 성의 물자를 임대해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나눠 주며 함께 먹도록 했다.

이어 군수물자로 다시 백성들에게 대여했던 곡식을 정확하게 계산해 되돌려 줬다.

이를 지켜본 경흥스님이 문무왕을 찾아와 당시 백제 부흥운동을 하던 인물들을 포섭해 통일신라에 충성할 수 있도록 포용하는 정책을 건의했다.

문무왕은 경흥스님의 건의에 따라 백제 출신 인물들을 공주성주와 고구려를 공격하는 장군으로 발탁해 신라 대신, 장군들과 똑같이 대우했다.

백제 인물들이 부흥운동을 스스로 그만두고 통일신라 발전을 위한 일에 적극 참여했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 북쪽, 삼랑사지 남쪽에 얼굴이 크게 훼손된 노서동 석불입상이 있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남항사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그때부터 문무왕은 경흥스님을 책사로 삼아 곁에 두고 불교진흥정책과 함께 전쟁에서의 전략도 함께 고민하게 했다.

경흥은 그의 폭넓은 인맥을 동원해 백제 경계지역과 고구려 깊숙한 곳까지 관리와 장군들을 설득해 싸우지 않고 신라로 흡수 합병하는 평화의 전쟁을 전개했다.

문무왕은 전쟁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경흥대덕에게 법회를 열어 사병들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불교의 이념에 대해 가르치도록 했다. 이를 통해 병사들이 군사훈련을 통한 신체적인 단련과 정신적인 수련을 함께 병행해 왕의 군대는 강하게 성장해갔다.

왕의 숙소 옆에 경흥의 막사를 크게 지어 숙소와 함께 강의실을 마련했다. 경흥은 강의와 사병들의 신상문제를 상담하는 역할까지 기꺼이 수행해 착하며 강한 군대로 만들어가는데 일조했다.

문무왕과 경흥은 장군과 군사의 관계에서 발전해 완전히 친구처럼 가까워져 서로를 이해하고 믿고 아끼는 사이로 발전했다.

경흥의 불교적 수양도 전쟁터에서 깊어졌다. 가르치기 위해 공부를 하다보니 불교 또한 이론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도 접목한 생활불교가 돼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경흥은 혼자 정신을 수련하던 소승불교에서 원효가 주장했던 대중불교를 서서히 몸으로 익히고 받아들였다. 자연스럽게 병사들과 백성들에게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철학을 전파하게 됐다.

경흥은 원효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았으나 문무왕의 주선으로 분황사에 남은 원효의 깨달음을 상당부분 습득하게 됐다.

경주 노서동 석불입상 보호각 일대에 경주시외버스터미널과 예식장 등의 상가가 넓게 조성돼 있다. 신라시대 남항사지로 전해지고 있다.


문무왕은 고구려를 정벌하고, 당나라군사까지 몰아내어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룬 후 경흥에게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교리를 책으로 만들어 보세요”라고 명하고 삼랑사에 머물게 했다.

문무왕은 죽기 전에 아들 정명에게 “후일 네가 왕이 되거든 경흥대덕을 국사로 책봉하고 모든 일을 그에게 물어 시행하라”고 틈만나면 당부하듯 일렀다.

경흥은 왕의 분부에 따라 삼랑사에서 외출을 삼가고 책을 집필하는데 몰두해 왕이 유명을 달리하는 것을 알았지만 책임을 완수하지 못해 궁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멀리서 묵묵히 기도로 작별인사를 올렸다.

늦게 신문왕이 국로로 책봉하고 왕궁으로 불렀으나 경흥은 궁으로 들어가지 않고 삼랑사에 머물며 거리를 두고 왕명이 있을 때만 응했다.

그러나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은 서신으로 알려 예방하게 했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반란에 대한 낌새를 어머니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대비책은 경흥이 귀뜸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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