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12>진신석가가 공양을 받다

발행일 2021-05-03 09:26:4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남산의 신이 효소왕에게 길을 가르쳐

사천왕사지 서편 경주시 배반동 보물 제69호로 지정된 망덕사지 당간지주. 일반 당간지주와는 다르게 중간에 홈이 없고 맨 위쪽에 네모나게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해 만들었다.


신라 제32대 효소왕은 신문왕의 아들이다. 692년 7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효소왕이 12살에 망덕사를 지어 낙성식에 참여했을 때 역시 철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이야기가 삼국유사 진신석가 공양편에 나타난다.

효소왕은 경덕왕이 두 번째 간택한 왕비에게서 늦게 얻은 왕자다. 경덕왕은 통일신라 불교문화의 최고 절정기를 맞이했지만 후계자를 얻는데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얻는데는 실패했다. 사실상 통일신라의 소멸 기운은 경덕왕 이후부터 시작됐다.

효소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 섭정으로 왕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성인이 되기도 전에 죽음을 맞고, 성덕왕에게 왕위를 넘기는 비운의 왕이라는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

왕이라 하여도 왕답지 못해 진신석가를 만나고도 몰라보고 함부로 대해 그만 낭패스런 경황을 맞아버린 효소왕과 진신석가의 대화를 엿듣는다.

망덕사 금당지 앞의 동쪽과 서쪽에 두 기의 목탑지가 있다. 가운데 심초석과 빽빽하게 가로 세로 줄을 맞춰 박힌 기초석이 분명하게 남아있다.


◆삼국유사: 진신석가가 공양을 받다

장수 원년 임진(692)에 효소왕이 왕위에 올라 망덕사를 세워 당나라 황실의 복을 빌고자 했다. 그후 경덕왕 14년(775)에 망덕사의 탑이 매우 흔들리더니 이 해에 안사의 난이 있었다. 신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나라 황실을 위해 이 절을 세웠으니 그 감응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했다.

효소왕 6년 정유(697)에 낙성회를 열자 왕이 친히 행차해 공양하는데 행색이 누추한 어떤 비구가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 있다가 왕에게 “소승도 재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에게 맨 끝자리에 앉기를 허락했다.

재가 끝날 즈음 왕이 희롱하는 투로 말하기를 “그대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라고 물으니 비구가 “비파암입니다”라고 답했다.

망덕사 금당지에는 1천300여 년이 지났지만 주춧돌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왕이 “이제 가거든 누구에게도 국왕이 직접 불공하는 재에 참여했다고 이야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비구가 웃으면서 “폐하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진신석가에게 공양했다고 이야기하지 마시오”라고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 남쪽으로 향해 가버렸다.

왕은 놀랍고 부끄러웠으나 급히 말을 달려 동쪽 언덕 위에 올라가 그가 간 방향을 향해 멀리서 절하고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했다.

그 비구는 남산 삼성곡 혹 대적천원이라는 바위 위에 도착해서 지팡이와 바리때를 두고 사라졌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와 보고를 드리니 왕이 마침내 비파암 아래에 석가사를 세우고 그의 자취가 사라진 곳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나눠 모셨다. 두 절은 지금까지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졌다.

‘지론’ 제4에 이런 말이 있다.

옛날 계빈국의 삼장법사가 아란야법을 행해 일왕사에 도착했더니 절에서 큰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가 그의 옷차림이 남루한 것을 보고 문을 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여러 번 들어가려 했으나 옷이 누추했기 때문에 번번이 들어가지 못했다. 임시 방편을 써서 좋은 옷을 빌려 입고 갔더니 문지기가 이것을 보고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망덕사 터는 제법 넓게 흔적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망덕사는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치기 위해 파견했던 군대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한 것을 두고 사유가 있을 것이라며 사천왕사를 조사하라고 사신을 보내자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 사신을 속이기 위해 사천왕사 대신 지었다고 전한다.


자리에 참석하자 갖가지 좋은 음식을 받아 그것을 먼저 옷에 주니 여러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여러 번 왔으나 매번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옷 때문에 이 자리에 들어와 여러 가지 음식을 얻게 되었으니 옷에 음식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고 말했다.

이번 일도 같은 사례인 것이다. 다음과 같이 찬한다.

‘향 사르고 부처님께 예배하며 새 불화를 볼 제/ 공양하는 재승들은 옛 친구나 부르네/ 이로부터 비파암 위의 달은/ 때때로 구름에 가려 못에 더디 비추네.’

경주 비파들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절경이지만 바위들로 울퉁불퉁한 곳에 기둥을 세웠던 흔적과 신라시대 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어 절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설화 속의 불무사가 있었던 곳으로 짐작되는 바위층.


◆새로 쓰는 삼국유사: 효소왕과 진신석가

경주 남산의 신들은 대체로 신라의 국운을 걱정하며 백성들의 안위를 보살폈다. 왕이 정치를 어지럽게 해 백성들이 불편하게 되면 어김없이 왕들의 앞에 나타나 올바르게 처신할 수 있도록 경계를 하곤 했다.

효소왕은 7세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 신목왕후가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신목왕후 또한 신문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앞세워 반란세력들을 진압하는 한편 외세침략에 대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동안 나라를 경영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효소왕이 등극한 이후 신목왕후를 지지하는 세력과 신문왕의 첫째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 보천과 효명을 지지하는 세력들간의 알력이 곳곳에서 불거져 나라가 어지러웠다.

특히 김흠돌 장군과 함께 반란을 도모하다 신문왕에게 발각돼 대부분이 참수형을 당했지만 일부 살아남은 세력들이 쫓겨난 왕비와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천과 효명태자를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궁중에 첩자를 심어두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불무사와 석가사 터가 훤하게 조망되는 곳의 비파를 닮은 비파암. 경주 서남산의 절경을 자랑한다.


그렇지만 보천과 효명은 신문왕이 내정과 외정에 정신이 없을 때 이미 정치에 미련을 버리고 강원도 오대산으로 숨어 불교에 뜻을 두고 수련에 매진했다.

보천은 세속에 미련을 과감히 떨치고 수련에 매진한 결과 깊은 깨달음을 얻어 몸을 자유롭게 쓰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효명은 어머니가 걱정되어 매번 수련에 깊숙이 빠져들지 못했다.

효명은 보천 몰래 길을 떠나 어머니를 보살폈다. 그런 효명이 기특해 어머니는 효명 주변에 몸이 날랜 부하 2~3명을 심어두고 그의 신변을 보호하게 했다.

보천의 안계가 넓어져 천안통에 이르렀다. 그는 이복동생 효소왕이 나라를 편안하게 잘 다스릴 수 있기를 희망하며, 어머니의 군사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백성들이 힘겨워하는 일이 없도록 안배했다.

비파암 주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석탑의 부재들. 절이 있었던 곳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보천이 오대산에서 몸을 날려 순식간에 남산자락에 이르러 은거지를 마련하고, 아무도 모르게 어머니가 궁궐에서 조금 벗어난 망덕사에 기거할 수 있게 했다.

당시 왜구와 백제, 고구려 후신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나라 전체가 불안정했다. 그러나 어린 효소왕은 어머니의 치마폭에 쌓여 나랏일은 뒷전이고 기름진 음식과 여색에 빠졌다.

효소왕의 어머니 신목왕후 또한 정세에 밝지 못해 귀족들의 정치놀음에 빠져 백성들의 어려움은 헤아리지 못했다.

이때 당나라는 고종황제의 황후로 등극한 측천무후의 세상이 돼 있었다. 고종은 이빨 빠진 호랑이로 측천무후의 세치 혀에 놀아나는 허수아비 황제 노릇에 세상 돌아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신라 정벌에 나섰던 50만 대군이 수장된 사실을 보고받은 이후 삼장법사를 통해 그 내력을 정확히 간파했다. 측천무후는 악붕구를 사신으로 보내 사천왕사의 비밀을 알아오게 했다.

악붕구가 신라로 들어왔을 때 보천은 신라 대신들 틈에 끼어들어 은근히 악붕구를 남산을 둘러보게 해 천룡사로 안내했다. 악붕구는 남산의 지세에 감탄하며 천룡사에서 신라의 기운이 크게 번창하게 될 것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종말 또한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경주 남산 비파곡 제2사지에 2000년 발굴조사 결과 복원한 삼층석탑.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48호로 지정되었다. 큰 자연석을 기단으로 삼아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전망이 훤하다.


뒤늦게 자신이 신라로 오게 된 본분을 깨달은 악붕구가 남산에서 내려가 사천왕사를 둘러보기를 원했다. 이때 또 보천은 신라 대신들 틈에서 악붕구에게 뇌물을 주어 망덕사를 보여주게 했다.

망덕사는 당나라를 속이기 위해 급하게 지은 절이지만 사천왕사와 비슷하게 규모도 크고, 형식도 거의 같게 했다. 특히 동서 7층목탑은 사천왕사의 목탑과 유사하게 축조했다.

악붕구가 돌아가고 효소왕은 망덕사 낙성식을 열어 축하연을 거창하게 펼치기로 했다. 이때를 기회 삼아 반란을 도모하려는 어머니와 추종세력을 보천이 만류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나라가 안정이 되고 권력은 자연스럽게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잔치가 무르익을 무렵 보천은 허름한 옷을 입은 누추한 승려의 모습으로 법회에 나타나 효소왕을 만나 가슴에 깊이 새길 수 있는 교훈을 남겼다.

보천은 왕에게 “나라의 살림은 백성들의 땀으로 이뤄진다”며 “기름진 음식은 백성들의 피와 눈물이오니 달게 드셔야 하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몸을 솟구쳐 남산으로 날아가버렸다.

효소왕은 깜짝 놀라 자신을 돌아보고, 남산에 불무사와 석가사를 짓게 하고, 그때부터 불교의 뜻을 나라를 운영하는 기본 방침으로 정하게 하는 법률을 마련하게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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