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

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

입에 담고 싶지 않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불신 사회다. 그 원인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정부 주도의 압축 경제 성장 정책은 고도성장과 함께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이 시기에는 과정보다 결과가 중시됐다. 정치권력과 기업은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를 건너뛰고 빨리 가시적 성과를 내는 길을 찾으려고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정경유착, 권언유착 같은 다양한 부조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부정부패와 도덕적 해이는 일반 국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정에서 요령과 편법, 탈법과 불법을 일종의 능력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나 자신과 이해관계가 얽힌 집단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남도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 내 가족, 내가 속한 집단이 아니면 무조건 믿지 않고 일단 의심을 하고 살펴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실패와 낭패를 줄이는 신중한 접근 방법이기도 했다. 출세와 돈벌이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풍조가 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번졌고, 우리는 저신뢰 사회로 전락하게 됐다. 민주화에 이어 수평적 정권 교체까지 이룩했지만 우리는 아직도 구시대의 악습과 폐단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문 대통령 ‘취임 4주년 특별 연설’과 ‘질의응답’을 두고 말이 많다.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긍이 되는 내용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현 정권과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쪽은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치고 무조건 옹호하며, 반대 진영은 모든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거부하고 있다.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여유, 비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열린 마음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통령의 ‘백신 확보’란 말을 두고 ‘확보’란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것이라며 ‘계약’과 ‘확보’는 다르다고 비난한다. 부동산 정책은 어떤 말을 해도 국민적 분노와 좌절, 허탈감만 준다고 혹평한다. 대북 정책에 대해서도 현실성이 결여된 굴욕적인 저자세라고 비난한다. 에너지 자원과 저탄소 정책에는 동의하지만 안전하고 신뢰할만한 원전 건설과 유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에는 강하게 불만을 제기한다. 인사청문회에서 도덕성 검증은 비공개로, 정책 검증은 공개 방식으로 하자는 제의에 대해서도 집권당이 야당이었을 때 어떻게 했는지를 돌이켜 보라며 이 또한 내로남불이라고 비판한다. 대통령 취임 4주년 특별 연설을 둘러싼 논쟁과 비판을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각한 분열과 갈등에 휩싸여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스탠퍼드 대학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그의 저서 ‘트러스트’에서 한 나라의 경제는 규모만으로 설명할 수 없고 문화적 요인이 중요하다고 했다. 문화적 요인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며,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뢰’라고 했다. 그는 서로를 신뢰하는 고신뢰 사회면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서로를 불신하는 저신뢰 사회면 경제적 번영이 힘들다는 점을 예증하고 있다. 그는 개인주의, 가족주의에 기반을 둔 저신뢰 사회의 특성을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공동체적 연대와 결속의 기술을 터득해야 하며 신뢰는 경제와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놀라운 가치라고 강조했다.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믿음을 갖고 배려하고 협력한다면, 사회적 거래 과정에서 생기는 비용이 감소하고 예상치 못한 손실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이 줄어든다. 신뢰는 사회 발전의 기반이 된다는 말이다. 후쿠야마 교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국부의 81%를 사회적 자본으로 만들었지만, 후진국으로 갈수록 그 비중이 줄어든다고 지적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일찍이 한국을 저신뢰 사회(Low Trust Society)로 규정했다. 정치권이 귀담아들어야 하는 이야기다. 우리는 식량과 에너지 자급이 안 되는 자원 빈국이다. 근면과 성실, 상상력과 창의력, 사회적 자본인 신뢰를 바탕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 과잉으로 비정치적인 것을 정치화하고, 사적 이슈를 공적 이슈로 증폭 시켜 갈등을 일상화하고 있다. 우리는 상호 존중과 배려, 소통을 통해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고 한시바삐 신뢰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 상생과 공존의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정치가 국민에게 희망은 주지 못할망정 갈등과 분열의 온상이 돼서는 안 된다. 정치권의 성찰과 반성을 촉구한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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