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과 인권 사이 ~

…위안부 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잊고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중년시절 할머니 사진은 50년 전 베트남에서 만났던 그 여자와 많이 닮았다. 얼굴, 나이, 말씨. 허나 할머니는 그때 대만에 있었다고 했다. 고명딸이라니 자매일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닮긴 했다?/ 월남전 참전 중에 중년의 한국여자를 만났다. 위안부로 있다가 내팽개쳐진 여자로 베트남 남자와 살고 있었다. 그 난리 통에 살아남기나 했을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하나 둘 재생됐다. 일단 재생된 기억들은 떨쳐버리려 해도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그는 우기에 매복 작전에 참여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다섯 명을 사살했다. 소대장은 매장을 하고 절까지 했다. 그 인간적인 소대장은 부비트랩에 걸려 곧 전사했다. 먼저 보고 먼저 쏘는 놈이 살아남았다./ 미군은 수송기로 고엽제를 뿌렸다. 모기가 달려들지 않는다며 다들 그것을 덮어썼다. ‘안개비 샤워’라 불렀다. 베트콩은 한 산촌마을에 출몰했다. 첨병이 마을로 잠입하다가 벌집을 건드렸다. 말벌의 공격으로 우회하는 길로 빠졌다. 논둑길로 올라섰을 때 총소리와 함께 전우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그는 미친 듯이 총을 난사했다./ 그의 보직이 행정병으로 바뀌었다. 촌장과 주민을 관리하고 베트콩과 주민을 가려내는 일을 맡았다. 그 때 그 여자는 부대 철조망 밖에서 푸성귀를 팔고 있었다. 한국여자란 걸 알고 그 여자를 스파이로 섭외했다. 남편은 베트콩이었다. 어느 날 중대장은 그 여자를 부대 안으로 불러들였다.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성분 지도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남편과 가족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여자의 정보를 토대로 적성가옥과 위험지역을 가려 정밀타격 했다. 그 이후 그 여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여자의 생사여부가 궁금했다./ 외손녀가 결혼 준비 차 내려왔다. 자기 부모를 이혼하게 만들었다고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딸의 이혼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거북해서 그냥 그렇게 덮어쓰고 살아왔다. 그의 피부병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유전질환이었다. 그 사실이 사위에게 외도 명분을 줬고 이혼 사유로 악용됐다. 유전질환 핑계로 자기 친딸마저 팽개쳤다. 그는 책임을 통감하고 딸과 손녀를 보듬었다./ 그가 가려움을 못 참고 몸을 긁어대자 손녀도 따라서 몸을 긁었다. 손녀는 뜻밖에도 외할아버지를 오해하고 미워했던 자신의 과오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손녀는 훌쩍 커 있었다. 결혼식 날, 자신을 버린 아버지 대신 자신의 손을 잡아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서 신부의 손을 잡고 카펫 위에 섰다. 벽을 극복한 두 남녀의 새 출발을 축복하는 박수소리가 오래도록 들려왔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희생된 사람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이다. 큰 수레바퀴에 치여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숙연해진다. 일제 만행에 심신이 거덜 나고 설상가상 앵벌이로 전락한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이 가슴을 찢는다. 자유세계를 지킨다는 명분과 돈을 벌어온다 실리, 말하자면 도랑 치고 가재 잡겠다는 의도로 파병이 이뤄졌다. 다만 생사기로에서 고군분투했던 장병들이 다시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어이없는 상황에 망연자실할 뿐이다. 그때 옳은 일이 지금은 옳지 않을 수 있고, 국가적 차원에선 대의라 하더라도 개인적 차원에선 인권 침해 소지가 있을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는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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