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과 무릎사이

발행일 2021-05-23 15:18:4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맑은 산봉우리에 눈이 시원하다. 뿌옇게 가렸던 것들이 비에 다 씻긴 모양이다. 짙어 가는 초록 잎들이 존재를 자랑하자 수은주가 급상승이다. 여름이 성큼 다가섰다.

코로나19의 지역 발생이 다시 걱정이다. 흥이 넘치는 곳에서부터 불꽃이 튄 모양이다. 선별진료소 당직을 서는 날이었다. 밤이 깊어 새벽으로 넘어가면 찾아오는 이들도 뜸해 아침 동이 트기 시작하면 다시 시작하곤 했건만, 지난밤엔 잠시 눈꺼풀 내릴 시간도 없었다. 몸피를 불려 둥그러져 가는 열하루 달 아래 서서 지난 봄, 어느 저녁이 뇌리를 스친다. 다시는 그런 감정에 들지 않기를 바랐었다. 거리 두기하며 줄 지어 서 있는 이들의 그림자를 살피며 제발 이 북새통이 하룻밤의 해프닝으로 끝나기를.

몸담았던 직장에서 떠나 새로운 일을 기도하고 있기에 여기저기 다니며 준비할 것이 많아진 요즘이다. 할 일이 많아지고 챙겨할 사람들이 있어 발품을 많이 팔면서 다닌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한 여름 같은 더위를 못 이겨서 카페에 앉을 자리를 찾았다. 새로운 건물 1층에 위치한 그 카페에서 바라보는 햇살은 더없이 평온하다. 창가에 앉아 오랜만에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모처럼 시간 부자가 된 것처럼 여유를 부려본다. 물방울이 맺히는 유리컵을 앞에 두고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한다. 이런 순간 이런 공간, 늘 찾아갈 수 있는 날이 어서 되기를 바라며 고개를 들었다. 창밖에서 한 여인이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이쪽저쪽 돌려가며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다. 카페 창을 향해 서서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그것이 거울이라 생각한 듯하다. 유리 중간에 보호필름이 붙어 있어서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고 거리의 모습에 자기가 서 있는 것이 뵈니 자기만 보인다고 생각한 것일까. 카페 안에서 누군가가 보고 있다 생각하면 그런 모습이었을까. 그 모습을 보면서 알았다. 안에서만 밝은 바깥 모습들이 보인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무심코 지나치는 일들이 참 많았을 것 같다. 나만을 위하며 자기중심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자신의 편리를 위해 주변 환경을 바꾸고 꾸미고 생활해 나가고 있지는 않았는가.

창밖 길 위에는 내리쬐는 햇살에 좌판을 펼쳐놓고 삶의 여정을 즐기는 이들이 보인다. 좌판 위에 놓인 물건들은 더운 햇살에 생생함을 지키려 애쓰고 있는 것 같다. 거리에서 자리를 잡고 밥벌이를 위해 오늘도 새벽부터 나와 앉아 있었을 그분들, 얼마나 덥고 힘이 들까. 그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햇빛을 피해 시원하게 앉아 있을 자리를 찾기에 급급해 빠르게 걷고 있었던 나를 돌아본다. 카페 안에 앉아서 바라본 창밖의 풍경은 처음에는 여유를 찾아 평온해 보였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내리쬐는 햇빛을 파라솔 하나로, 그것조차 구하기 힘들었는지 검은 우산을 펼쳐두고 손녀인듯한 어린 것의 손을 흔들어 대다가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 칭얼대는 어린 아이를 이리저리 어르고 있는 과일 파는 연세 지긋한 할머니의 모습에 이르자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 온다. 참으로 많은 것들을 놓치면서 살아오지 않았으랴. 살펴볼 틈도 없이 앞만 보며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내가 만약 주인장이 돼 나만의 진료공간을 설계할 날이 오면 그때는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 보리라. 진료할 때 환자를 마주보거나 책상 모퉁이에 앉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료실 모니터를 함께 보는 자리로 배치해 무릎과 무릎이 서로 스치는 거리에서 같이 자료를 보고 사진을 바라보면서 설명하리라. 아픈 이와 그의 보호자와 함께 진료한 내용과 증상들을 자세히 이야기해가면서 그들의 이야기에도 충분히 귀 기울여 들어주는 시간을 마련해보리라.

내 가족이 아파 동동거리며 지샌 밤들을 생각하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무엇보다 일등 순위 일 것 같다. 자리를 잘 배치해 환자와 가까이서 소통하다보면 내 마음과 상대의 마음이 더 통하여 훨씬 더 잘 치료되지 않을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향해 바라보라고 이르지 않던가. 마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봐야 서로가 느끼는 감정이 같아질 것이고 담담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공감대도 이뤄지지 않으랴. 사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진료실 컴퓨터 모니터 방향과 환자가 앉는 의자 위치가 알게 모르게 안정감을 좌우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자리를 잘 배치해 진료하다보면 서로 간에 친밀감인 래포가 잘 형성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 잘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눈에 보이는 것을 함께 바라보고 자리를 가까이 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희망사항을 조금은 더 편하게 전할 수 있지 않으랴.

자리 배치의 이상이라고 부르고 싶은 ‘knee to knee’를 생각하면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우리의 소망이 빨리 이뤄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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