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예천 남악종택

발행일 2021-05-30 18: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경북 예천지역에는 “구계가서 집 자랑 하지 말고 금당실에서 옷자랑 하지 말라”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다. 구계는 용문면 구계리의 마을 앞 실개천이 아홉 여울이라고 하여 구계라고 불려졌다. 용문면 죽림에 있는 금당실은 어떤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예천권씨 집성촌을 이르는 말이다.

용문면 구계리에 있는 남악종택은 소박하면서도 운치가 서린 고택이다. 조선 중기 문신으로 퇴계 이황의 문인인 남악 김복일(1541~1591)의 호를 취한 남악종택이 하드웨어라면,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로 찍어낸 ‘사시찬요’ 등 220종의 고서는 이 종가의 소프트웨어이다.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에 초가집과 기와집이 한 공간에 자리한 중요민속자료 제248호로 지정된 남악종택을 찾았다.

◆오룡의 막내로 예천의 학문을 일으킨 김복일

의성김씨의 비조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김석이다. 김석의 13세 김만근(1446~1477)선생은 안동 천전리에 터를 잡은 뒤 그 후예들이 안동 일대에 살게 되면서 천전김씨로도 불렸다.

김만근의 손자 15세 김진(1500~1580)이 가세를 일으키면서 영남은 물론이고 전국에 이름을 떨치면서 오룡(五龍)으로 불렸던 다섯 아들을 두었다.

오룡은 약봉 김극일(1522~1585), 구봉 김수일(1528~1583), 운암 김명일(1534~1569), 학봉 김성일(1538~1593)과 남악 김복일이다. 의성 김문을 널리 알렸던 오형제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김수일, 김명일은 소과에 김극일‧김성일‧김복일 세 형제는 대과에 급제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오룡의 막내였던 남악 김복일은 남악공파의 파조이다. 그는 천전리에서 태어나 예천군 용문면 죽림 예천권씨의 사위가 되어 금당실의 처가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조선의 비기인 정감록에 “용문은 우리나라 십승지지의 하나로 병화가 들지 않는다”고 해 임진왜란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용문면은 조선시대, 사람이 살기 좋은 길지로 인식되어 왔던 곳이다. 의성 김씨들은 이후 구계리로 터를 옮겨 자리를 잡았다.

구계리에 정착한 김복일은 29세(1569) 때 금곡서당창립회문을 지어 예천지역의 학문을 일으키는 터전을 열었다. 금곡서당은 뒤에 정산서원으로 발전했다. 35세에 성균관학유로 벼슬길에 나갔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39세에 박사에 올랐고, 40세에 형조좌랑으로 승진하였으나 부친상으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43세에 전라도 어사, 45세에 울산군수, 51세(1591)에 함경도절도사로 추천되었으나 8월17일 운명했다.

김복일의 증손자인 김빈은 호가 갈천으로 형조참의, 좌승지, 공조참의, 도승지를 거쳐 74세(1694)에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였고,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현재 남악종택은 종손인 31세(남악파조로부터는 15세) 김종헌씨가 김복일의 유지를 받아 500년 이어온 남악종택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학이 날아가는 형세의 가학루

남악 김복일의 종택은 중요민속자료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계리 야산 앞자락에 자리잡은 남악종택은 태백산 문수지맥의 맥을 이은 안동의 학가산 국사봉의 지맥이 머문 야산의 끝에 앉아 동남향을 하고 있으며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의 형국이다.

1981년 지붕의 기와를 수리할 때 ‘인조 12년(1634)에 용문사의 승려 운보가 조성했다’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이 종택의 조성연대가 1634년으로 추정된다.

이 종택에서 김복일의 종질이자 병자호란 때 척화신으로 유명한 불구당 김주(1606~1681)가 태어났다. 김주는 병자호란 때 청과 화친을 금하자는 척화소(斥和疏)를 올렸고, 이후 청음 김상헌과 함께 최후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해 청음 김상헌과 같이 청나라로 끌려 갈 왕명을 기다리다 조정공론으로 풀려났다. 그 뒤 그는 오랑캐를 평정하자는 글을 올리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유림에서는 김상헌과 더불어 끝까지 절의를 지킨 김주를 숭정처사로 존숭하고 있다.

김주는 1648년(인조 26) 무장(전북 고창) 현감이 되자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현청을 녹봉으로 수리했다. 이러한 공으로 1650년(효종 1) 왕은 그에게 표리일습(겉감 옷과 안감 1벌)을 하사했다. 그 뒤 연안현감, 양산군수, 함평군수, 양산군수, 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673년(현종 14) 고향인 예천으로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진력했다.

이러한 불구당의 애국정신은 의성김씨 후손들에게 이어져 일제 강점기에 김병동(1858~1928), 김현동(1876~1927) 등 독립운동 유공자 85명을 배출한 독립운동 명문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남악고택은 정면 9칸 측면 7칸의 ‘ㅁ’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기와집으로 구성됐고, 그 앞으로 ‘ㄱ’자로 된 초가 문간채가 배치돼 있어 이채롭다. 안채의 상부 구조는 오량가로 돼 있고, 사랑채인 가학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기와를 얹은 오량가이며, 앞면보다 뒤가 높아지는 지세에 맞춰 경사지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계자 난간을 두어 누각형식의 아름다운 건축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가학루의 아래층 기둥인 누하주는 굽은 나무를 그대로 살려서 한국적인 소박한 멋을 보여주고 있고, 사랑방의 반자는 우물반자로 꾸몄으며 처마 곡선을 우아하게 처리하여 날아가는 학을 연상시킨다. 동남향의 학가산을 바라보며 마치 학이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어 ‘가학루’라고 부른듯하다. 갈마음수형을 보완하듯 건물 앞쪽에 작은 연못과 냇물이 흐르도록 조성되어 있다.

지형의 높낮이를 잘 이용하여 각각의 공간마다 통풍과 채광이 원활하도록 평면구성을 한 점도 특징적이다. 또한 초가 문간채와 안채의 기와가 잘 어울려 보이고 처마끝선이 상보적이라 독특해 보인다.

◆조선 초기 계미자로 찍은 사시찬요

남악종택에서 주목되는 것은 소장하고 있는 고서로 22종 266책으로 방대하다. 금속활자본 5종 8책, 목활자본 1종 1책, 목판본 27종 35책, 석인본 1종 1책 및 필사본 183종 220책으로 필사본이 가장 많다.

주요활자본은 중국 농서인 계미자 ‘사시찬요’, 시와 문을 선집한 ‘상설고문진보대전’, 맹자를 언해한 한글활자본인 ‘맹자언해’ 등이다. 주요목판본은 1425년에 간행된 ‘양촌선생입학도설’, 17세기 간행된 ‘소학언해’ 등이다. 주요필사본으로는 효종9년과 현종1년에 이르는 승정원 사초로 보이는 ‘무술칠월일기’, 금곡서당 창립의 목적을 기록한 ‘덕진동금곡서당창립회문’ 등이다.

고문서는 총 1718건으로 교지 51건, 제문 100건, 간찰 663건 등이다.

이 가운데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사시찬요’이다. 이 책은 계미자 소자본 5권 1책으로 조선초기 금속활자본이다. 서기 996년 당나라 한악이 편찬한 것으로 1월부터 12월까지 시기별 농법이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최초의 농서인 북위의 가사협이 저술한 ‘제민요술(532~549)’과 송나라 진부의 ‘농서(1149)’사이에 편찬돼 농업사에서도 중요한 위상을 지니는 책이다. 1403년 계미년에 만들어 1420년까지 사용된 조선시대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로 찍어낸 이 책은 한·중·일 삼국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1961년 목판본이 일본에서 발견됐고 2015년 필사본이 발견된 적이 있지만 금속활자본이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서풍은 구양순의 해서에 가깝다. 특히 계미자본 고서 자체가 희귀하고 서양 최초 금속활자인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최소 30년 앞서기 때문에 국보급 문화재로 추정된다.

목판본 1책인 ‘양촌선생입학도설’은 권근(1352~1409)이 유배지인 충주 양촌에서 지은 것으로 1425년(세종 7)진주목에서 간행된 인출본이다. 1397년 처음 간행된 이후 려말선초의 초학자에게 사서와 오경의 핵심내용의 이해촉진을 위해 간행된 목판으로 당시 인쇄의 면모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다.

필사본인 ‘덕진동금곡서당창립회문’은 1569년 필사된 김복일의 친필본이다. 금곡서당의 창립목적과 당위성 전달을 위해 필사하였다. 당시 예천에는 2개의 서당이 있었지만 그는 “배우고자 하는 자는 그 류를 가리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군내에서 빈부를 가리지 않고 동참할 것을 제안하였다. 80명의 명단과 수결이 있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 이전의 서당창립과정과 조선전기 지방교육체계를 살펴볼 수 있어 눈길을 거둘 수 없다.

남악고택에는 하드웨어인 독특한 구조를 지닌 자연친화적인 고택과 다양한 고서들로 채워진 소프트웨어가 있다. 가학루 앞에서면 한 마리 학이 되어 5백 년 이전 조선시대로 세월을 가로질러 훨훨 날아가게 된다.

정태수

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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