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역 병력 집결지, 병력과 물자수송||임시수도 정부청사 터, 경상감영공원||임시국회의사당

▲ 1950년대 대구역 병력 집결지.
▲ 1950년대 대구역 병력 집결지.
6·25전쟁이 발발한 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자 자연스럽게 대구는 임시수도가 됐다.

대구지역 중에서도 중구는 핵심지역이 됐다.

현재 흔적 및 표식은 없지만 중구지역 곳곳이 국가 수호 사적지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대구역은 병력 집결지, 경상감영은 임시수도 정부청사, CGV대구 한일점은 임시 국회의사당,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는 육군본부가 사용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대구역은 북한군의 남침 이후 낙동강방어선이 편성될 무렵 국군의 전방 지역 전투부대에 대한 병력과 물자 수송을 위해 사용됐다.

전쟁 발발 후 대구역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북한군은 빠른 속도로 남침을 했으며 7월 중순 경에 이미 충청도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낙동강 방어작전 시기 당시 대구역 광장에는 많은 학도병들이 전선에 출정하기 위해 자원해 몰려들었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피난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대구역에 모여 구국의 결의를 다졌다.

1950년 7월16일 이승만 정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이동했다.

당시 정부는 경북도청인 경상감영에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했다.

신성모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현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자리인 국방부 임시청사에서, 조병옥 당시 내무부장관은 도지사실을, 도지사와 내무차관은 도내무국장실을 각각 집무실로 썼다고 전해진다.

현 CGV대구 한일점은 당시 문화극장으로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다. 전란 32일째인 7월27일 임시 의사당인 문화극장에서 제8회 임시국회가 열리기도 했다.

참석의원은 모두 130명이었다. 전체 210명의 의원 중 80명 의원들은 실종되거나 생사가 묘연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재 CGV대구 한일점 역시 개·보수 되고 증축돼 전쟁 당시 국회의사당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부지는 육군본부가 대구로 이전해 사용했던 곳이다.

정부는 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문제를 검토하게 됐다. 그동안 육군은 육·해·공군별로 이미 미군의 각 군과 연합작전을 실질적으로 실시해 왔다.

미 제8군사령부가 대구로 이동해 개소하자 육군본부도 대구로 이전했다. 육군본부는 이때부터 미 제8군사령부와 연합작전회의를 가짐으로써 국군도 극동군의 각 구성군과 통합작전에 들어가게 됐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에 돌파될 위기에 처해 대구가 위협받자, 8월17일 정부가 부산으로 천도를 결정했다. 약 한 달간 대구의 임시수도정부청사는 존재했다.

▲ 1950년대 문화극장.
▲ 1950년대 문화극장.








신정현 기자 jhshin@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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