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신이 다 삭도록 노역에 쫓기다가/헛간에 처박힌 게 네 잘못은 아니지/치매가 밤을 더듬는 손금마저 없는데//어둠을 톺아 내는 나무지게 살펴보니/이 눈치 저 눈치로 숨어살던 거미가/햇살을 촘촘 엮어서 집 한 채를 올렸네//한평생 땀에 절어 하늘을 받든 것이/문명에 버림받고 이름마저 잊혔지만/단 하루 허락된다면 별을 지고 싶다네

「오늘의시조」 (2020, 제14호)

윤정란 시인은 경남 김해 출생으로 1983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푸른 별로 눈뜬다면’, ‘꽃물이 스며들어’, ‘뿌리가 이상하다’, ‘너 참 잘났다’가 있다. 그는 상처 받은 이들에게는 위로가 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사랑이 되고 어둠 속을 헤매는 이들에게는 불빛이 돼 다함께 어울리는 노래로 피어나기를 바라며 또 한 채의 집을 짓는 시인이다. 강희근은 그의 세계를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지만 조선 시대의 유교적 이성주의와는 확실히 다른 세계에 놓여 있다고 보면서 포괄적이고 개념적인 상황이 아니라 개별적인 정서와 관념이 드러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고 봤다. 그리고 한의 정서에도 상당 부분 연결되어 있는 점을 조명했다.

‘나무지게 다시 읽다’를 아프게 살핀다. 삭신이 다 삭도록 노역에 쫓기다가 헛간에 처박힌 게 네 잘못은 아니지, 라는 진술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읽는다. 그는 이미 치매가 밤을 더듬는 손금마저 없을 만큼 신산의 삶 끝까지 와 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헛간에 처박힌 것은 분명히 그의 잘못일 수가 없다. 다음 둘째 수에서 화자는 어둠을 톺아 내는 나무지게를 살펴보는데 이 눈치 저 눈치로 숨어살던 거미가 햇살을 촘촘 엮어서 집 한 채를 올리는 것을 본다. 이 장면은 고독한 나무지게에게 위로가 되는 일이다. 한평생 땀에 절어 하늘을 받든 그 결과가 문명에 버림받고 이름마저 잊혀진 일이 됐지만 그러한 지게에게도 소망이 하나 있다. 단 하루 허락된다면 별을 지고 싶다는 것이다. 소박한 나무지게의 바람은 곧 이뤄질 성 싶다. 예전에 지게는 굉장히 긴요한 생활의 도구였다. 시골 생활에서 지게는 쓰임새가 많았다. 지게로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던 일은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지게를 생각할 때면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아버지 등에 늘 붙어 있다시피 한 지게를 통해 우리는 지난한 노역의 삶을 살았던 아버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단순한 회고만은 아니다.

그는 또 ‘풀을 베다’를 통해 전원생활의 애환을 노래하고 있다. 싹둑 싹둑 잘리는 풀이라 밟고 가도 살다보면 꽃필 날 한 번쯤 있을 텐데, 라면서 무조건 들이대다가 뿌리까지 뽑힐지 모른다는 우려를 한다. 자란 풀은 베더라도 그 생명의 근원은 소중히 지켜져야 한다는 생명 사랑이다. 때로는 날 선 마음 잘 삭혀 버무려서 세상의 길이 되는 희망을 노래하기도 하고 때로는 낫에 베인 채 적개심을 쌓는 때도 있음을 표출한다. 그리고 손발이 다 닳도록 허공에 새긴 이름을 떠올리면서 바람에 흘린 눈물 바람으로 닦아 놓고 내 안의 초록 길을 본다. 해와 별이 숨 쉬는 곳이다.

‘나무지게 다시 읽다’를 살피다가 잊어버린 것을 떠올려봤다. 바로 지게작대기다. 지게를 받치는데 쓰이는 지게작대기는 아주 유용한 것이었다. 세상을 가리키기에 지게작대기만한 것이 없고, 세상을 떠받치기에 지게작대기만한 것이 없으며, 세상을 두드리기에 지게작대기만한 것이 없지 않는가. 아마 낡은 나무지게 가까이 지게작대기도 하나 놓여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풀을 베는 일, 나무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일은 자연과 함께 하는 일인데 특히 나무지게는 추억 속의 도구로만 남은 듯해서 아쉬움이 크다.

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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