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18>수덕사의 혜현

발행일 2021-06-14 11:30:4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신통한 힘을 가진 혜현 수덕사에서 깨달음을 전해

국보 제49호로 지정된 수덕사 대웅전. 고려 충렬왕 때인 1308년 지은 국내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신라시대에 최초 건립해 불에 타 고려 우왕 때 1376년에 다시 지은 국보지만 수덕사보다 약 70년 늦은 시기에 건축됐다.


예산 수덕사는 많은 사람의 귀에 익숙하다. 대중가요 수덕사의 여승 노랫말에 애잔한 사연으로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수덕사의 역사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수덕사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 삼국이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당시에 이미 백제 땅에서 주목받는 사찰로 법등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으로 전한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신라 불국사보다 이른 시기에 설립돼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깊은 사찰이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신라 진평왕이 한창 집권하고 있을 당시에 백제 땅의 수덕사에서 혜현이라는 스님이 깊은 깨달음으로 중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혜현스님이 백제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신라에서는 원광법사가 진평왕의 부름을 받아 화랑들의 세속오계를 가르치는 등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혜현은 원광, 의상, 원효, 자장 등의 신라 승려들과 다르게 수덕사에서 강론으로 깨달음을 전하다가 홀연히 자취를 감춰 혼자 조용히 산속에서 수도하다 입적했지만 중국에서도 유명한 스님으로 기록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에 안치된 목조 삼존불상. 육각수미단과 함께 보물 제1381호로 지정됐다. 대웅전의 삼존불 뒤 괘불함에 보관되는 노사나불 괘불도는 보물 제1263호로 지정됐지만 큰 행사때나 볼 수 있다.


◆삼국유사: 혜현이 고요함을 구하다

승려 혜현은 백제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해 힘써 뜻을 모아 법화경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기도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니 신령스런 감응이 참으로 많았다. 또한 삼론을 배우고 수도를 시작하니 신과 통했다.

처음에는 북쪽에 있는 수덕사에 머물면서 신도가 있으면 강론을 하고 없으면 불경 외우기에 열중하니 사방의 먼 곳에서도 그의 풍도를 흠모해 문밖에는 신발이 가득했다.

차차 번거롭게 모여드는 것을 싫어해 드디어는 강남 달라산으로 가서 머물렀다. 그 산은 매우 험준하며 내왕이 힘들어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혜현은 고요히 앉아 번뇌 잊기를 구하다가 산중에서 생을 마쳤다.

수덕사 대웅전 바로 앞에 서 있는 수덕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 형식을 따르고 있어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돼 있다.


같이 공부하던 분이 시체를 운구해 석실에 모셨다. 호랑이가 유해를 다 먹어버리고 오직 해골과 혀만 남겨 뒀는데, 3년이 지나도 혀는 오히려 붉고 연했다. 그후 점점 변해 검붉고 단단하게 돌과 같이 됐다. 도를 닦는 승려들과 속인들이 그것을 공경하여 석탑에 간직했다.

혜현이 입적할 당시 세속 나이는 58세로 바로 정관 초년(627년)이었다.

혜현은 중국에 유학하지도 않고 조용히 물러나 일생을 마쳤으나 그 이름이 중국의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전기도 쓰여져 당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높았다.

또 고구려의 승려 파약이 중국 천태산에 들어가 지자의 교관을 받았으며 신이하다고 소문이 났는데 산중에서 죽었다. 당승전에도 실려 있는데 자못 영험한 가르침이 많았다.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녹미(주미)로 경을 전함에도 한바탕 수고로움 느껴/ 지난 세월 맑은 독경 구름 속에 숨었네/ 세간의 청사에 이름 멀리 날리니/ 죽어서도 혀는 붉은 연꽃의 꽃다움이어라.’

수덕사 대웅전에 이르는 길은 여러 문을 거쳐야 한다. 처음 도로에서 덕숭산으로 들어서는 길에 산문이 높이 서있고, 다시 수덕사 입구에 산문이 하나 더 있다. 조금 더 들어오면 이응노 화백이 거주했던 사적지 옆에 '덕숭산수덕사'라는 현판을 건 일주문이 있다.


◆수덕사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수덕사는 대중가요 ‘수덕사의 여승’으로 귀에 익은 편이다. 그렇지만 수덕사에 대한 내력을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수덕사는 창건에 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지만 학계에서는 백제 위덕왕이 재위하던 554년에서 597년 사이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덕사는 1937년 대웅전을 수리하면서 고려시대 충령왕 때인 1308년에 현재의 대웅전을 건립했다는 복장유물이 발견돼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보 제49호로 지정했다. 고려시대 유행했던 주심포 양식에 맞배지붕으로 임진왜란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한국 목조건축사에 매우 중요한 건물로 주목받고 있다.

수덕사의 관음바위표지석에 수덕사와 관련된 전설이 기록돼 있다.

수덕사 대웅전으로 들어서기 전에 1931년 만공 선사가 건립한 칠층석탑이 날렵한 몸매로 서있다. 문화재자료 제181호로 지정됐다.


때는 통일신라시대이다. 창건 이후 수덕사 가람이 날로 퇴락해 중창불사를 해야 했으나, 불사금을 조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여인이 절을 찾아와 불사를 돕는 마음으로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지라 그녀를 일러 대중은 한결같이 ‘수덕각시’라 불렀다.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여인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연일 수덕사를 찾았다.

대부호이자 재상의 아들인 ‘정혜’라는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청혼을 했다. 수덕각시는 중창불사가 원만히 이뤄지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정혜는 여인의 말을 듣고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끝내고 중창회향식을 갖게 됐다.

회향식에 대공덕주로 참석한 정혜는 수덕각시에게 같이 절에서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입을 말미를 주소서”라고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간 뒤 소식이 없었다.

정혜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도망갔다. 그 모습에 당황한 정혜가 여인을 잡으려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는 동시에 버선 한 짝만 남긴 채 여인은 사라지고 문득 사람도 방문도 없어진 자리에 집채만한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매년 봄이면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을 따 절 이름을 수덕사라 불렀다고 전한다.

수덕사 경내에 이응노 선생 사적지가 있다. 이응노(1904~1989) 화백이 작품활동을 하던 수덕여관과 우물, 암각화 등이 당시 모습으로 보존돼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혜현과 보덕이 원광의 뜻을 따르다

혜현은 신통력이 뛰어난 승려로 국운의 길흉도 미리 점치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에도 보덕과 담징 등의 유명 승려들이 있었으나 나라에서 도교를 우대하며 불교를 탄압해 담징은 일본으로, 보덕은 신라를 거쳐 백제 땅으로 망명해 은거했다.

특히 보덕은 고구려 패망의 징조를 읽고 신라에 의탁하려 했지만 이미 원광이 나라의 중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백제 완주로 옮겨 권력계층과 담을 쌓고 숨어 지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실권을 장악하고 나라를 북으로 크게 일으켜 중국이 견제에 나설 정도였다. 그러나 중국도 고구려로 여러 번 처들어왔으나 연개소문의 걸출한 무예와 뛰어난 지략 때문에 번번이 패하여 물러났다.

수덕사는 백제시대 고찰을 자랑하는 만큼 다양한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으로 오르기 전에 축대를 따라 담쟁이넝쿨이 길게 울타리처럼 이어져 있다.


고구려는 도교를 숭상하는 지배계층의 종교적 의식체계의 변화로 승려들과 백성들이 혼선을 빚으며 국론 분열조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유명 승려들은 깊은 산으로 들어가거나 이웃나라로 망명길에 올라 지배계층도 보이지 않게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백제는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을 데려와 왕비로 삼고 나라의 힘을 크게 일으키고 있었다. 무왕은 신라와 고구려 접경지역을 직접 군사를 지휘해 전쟁에 나서 연전연승하며 나라가 팽창일로를 걷고 있었다.

무왕은 대규모 사찰 정림사를 건축하는 등으로 불교 진흥정책을 쓰기도했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승려들을 국사로 책봉하는 등의 승려들이 직접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힘을 주지 않고 경계해 유명 승려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이 때문에 신통력을 가진 혜현조차 수덕사에서 찾아오는 중생들의 내적 평화를 위해 법문을 강론하다가 끝내 그의 능력을 펼치지도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산속으로 숨어들어 쓸쓸히 입적했다.

반면 신라는 진평왕이 원광법사를 국사로 초빙해 황룡사에 머물게 하며, 나라의 대소사를 모두 맡기고, 국내외로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는 일도 원광이 담당하게 했다.

수덕사 일주문을 지나면 우람한 금강역사가 있는 금강문을 넘어야 한다. 금강문을 지나 또 산길을 오르다보면 사천왕들이 눈을 부라리고 지키는 사천왕문이 나온다.


특히 원광은 화랑들이 나라의 기둥으로 성장할 수 있게 엄격한 계율을 만들어 청소년들의 교육 기반을 닦았다. 신라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청년들을 화랑으로 육성해 국력을 키우고, 스스로 행복을 찾아 생활하는 기반을 조성하여 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원광은 이미 삼국통일의 앞날을 예견하고, 백성들의 고통과 희생을 줄이고자 백제의 혜현, 고구려의 보덕 스님을 세 차례나 만나 그들이 삼국통일에 협력할 수 있도록 역할해 줄 것을 설득했다.

혜현과 보덕은 원광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이해하고, 일면 받아들였지만 자신들이 속했던 나라가 패망의 길을 걷도록 하는 일에 적극 나설 수는 없다는 뜻을 밝히고는 산속으로 은거하는 것을 택했다.

혜현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길”이라며 “지금 백제의 무왕은 자신이 최고라고 믿는 사람이어서 어떠한 말로도 설득할 수가 없어 백성들의 피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고 한탄하고는 스스로 은거해 산속에서 입적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 해석은 고운기의 ‘삼국유사’, 이범교의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 등을 참고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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