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19>신충이 벼슬을 버리다

발행일 2021-06-21 09:39:5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효성왕과 경덕왕 때에 중역을 맡았던 신충, 지리산에서 단속사 창건

지리산자락 단속사지에 보물 제72호와 73호로 각각 지정받은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이 통일신라시대 양식 그대로 복원돼 있다. 앞쪽이 동탑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단속사의 창립에 대한 이야기를 두 가지로 나눠 소개한다. 경덕왕 때 관리였던 신충이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와 단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와 역시 관리였던 이준이 조연소사를 고쳐 지으며 단속사라고 불렀다는 창건설화다.

단속사는 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법등을 이어오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불탔다. 다시 중건 되었지만 폐사되고, 지금은 동서 삼층석탑과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인근지역 발굴조사에서 금당터와 회랑터, 남문터 등의 사적지를 확인했지만 아직 사적지로 지정되지 않고 있다. 현대 단속사를 건립해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자흥 스님은 구산산문의 발생지인 단속사의 역사를 바로잡고, 단속사 복원에 이어 신행선사비 복원 등의 사업과 함께 생활불교 실천터전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속사지 삼층석탑 남쪽 100여m 앞 소나무숲에 경남 유형문화재 제696호로 지정된 단속사지 당간지주.


◆삼국유사: 신충이 벼슬을 버리다

효성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 현명한 인물인 신충과 대궐 정원의 잣나무 아래서 바둑을 뒀는데, 언젠가 신충에게 말하기를 “이 다음에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라고 하자 신충이 일어나 절을 했다.

몇 달 후에 왕이 즉위해 공신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잊어버리고 등급에 넣지 않았다. 신충이 원망하며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자 나무가 갑자기 누렇게 시들어버렸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알아보도록 했더니 신충이 지은 노래를 찾아 바쳤다. 왕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정무가 너무 바빠 하마터면 공신을 잊을 뻔했구나”라며 즉시 그를 불러 벼슬을 주자 잣나무는 그제야 소생했다.

보물 제72호 단속사지동삼층석탑.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물색 좋은 잣나무는/ 가을에도 떨어지지 아니하매/ 잣나무 너처럼 살아가자 하셨는데/ 우러러보던 그때 그 얼굴이 변하셨도다/ 달 그림자 비친 옛 연못에/ 지나가는 물결의 모래처럼/ 임의 모습이야 바라볼 수 있어도/ 세상의 모든 것 잃어버린 처지로다.’

뒷 구절은 없어졌다.

이리해 신충은 두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경덕왕 22년 계묘(763)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린 뒤 남악으로 들어갔다.

왕이 두 번이나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돼 왕을 위해 단속사를 세우고, 거기에 머물면서 평생 속세를 떠나 대왕의 복을 빌겠다고 원하니 왕이 이를 허락했다. 금당 뒷벽에 남아 있는 진영이 바로 신충이다. 남쪽에는 속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잘못 전달되어 소화리라 한다.

또 별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경덕왕 시대에 벼슬이 직장인 이순(李純)이 일찍부터 나이 50이 되면 반드시 출가해 절을 세우겠다고 발원했다. 천보 7년 무자(748)에 나이 50이 되자 조연에 있던 작은 절을 고쳐 큰절로 만들고 절 이름을 단속사라 했다. 자신도 또한 머리를 깎고 법명을 공굉장로라 하여 절에 20년간 머물다가 죽었다.

앞의 삼국사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므로 두 가지를 다 기록하여 의심을 없앤다.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공명은 다 이루지 못했는데 귀밑털이 먼저 세고/ 임금 총애 비록 많으나 한평생이 바쁘도다/ 언덕 저편 산이 자주 꿈속에 찾아오니/ 내 가서 향불 피워 우리 임금 복 비오리.’

단속사지의 사역경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매우 넓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지주가 서있는 곳에 조성된 소나무숲.


◆단속사

단속사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자락에 위치했던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창건된 사찰로 전하고 있다.

단속사는 삼국사기와 유사에서 748년 대나마 이순이 창건했다는 것과 763년 신충이 창건했다는 설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어 지금 학자들은 어느 것이 사실인지 연구과제로 삼고 있다.

현재 절터에는 보물 제72호 단속사지동삼층석탑과 보물 제73호 단속사지서삼층석탑이 비교적 깨끗한 모습으로 복원돼 있다. 주변에는 금당지를 비롯 강당지 등의 초석이 발견돼 신라시대 가람배치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 단속사에 기거하며 과거 공부를 했던 강회백이 심은 매화나무를 그가 정당문학 벼슬에 오르자 정당매라 불렀다. 지금은 고사하기 전 가지를 접목해 후계목으로 자라고 있는 정당매.


절터 주변에는 민가가 자리하고 있어 정확한 사역규모를 확인하기 어렵다. 또 남쪽 솔밭에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636호로 지정된 단속사지 당간지주가 3.73m 높이로 복원돼 있다.

석탑 부근에는 강회백이 과거하기 전에 이 절에서 글을 읽으면서 매화 한 그루를 심었는데 그 뒤에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해 그 매화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 했다. 정당매가 노거수로 수세가 좋지 않아 2013년 가지를 접목 번식해 후계목으로 자라고 있다. 정당매 앞에는 기념비와 비각 정당매각이 있다.

단속사지에는 신라와 고려 때의 이름난 승려들의 부도와 탑비가 많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지만 지금은 몇몇 고승들의 비신단편과 탑본이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 문호 최치원도 이곳에 들러 널리 구제하는 바위문이라는 뜻의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는 당호를 남겼다 한다.

단속사지가 있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자흥 스님은 서울에서 공부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단속사의 복원을 위해 옛 단속사 자리에 단속사를 짓고 법등을 이어가고 있다. 자흥 스님은 서울동방불교대학원에서 불교학과 박사과정 불교철학을 전공하고, 경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박사과정을 마쳤고 금강불교대학 이사장 및 불교평화연대 공동대표 등을 지냈다.

정당매와 정당매를 심은 선비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고 정당매각이 서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신충과 산적들

신충은 왕과의 작별을 위해 한 달에 걸친 술자리를 해야 했다. 경덕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신충과 함께했던 전쟁과 크고 작은 다툼, 사랑 이야기까지 밤이 깊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울고 웃는 신파극을 벌였다.

신충은 통일신라가 화려한 문화예술의 나라로 꽃피우기까지 반석을 놓는 역할을 해온 충신이었다. 전쟁터에서는 적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맹수 같은 장군이었고, 평소에는 나라의 살림살이까지 도맡아 챙기는 지략가이자 살림꾼이었다.

신충은 또 효성왕, 경덕왕과 어릴 때부터 궁궐에서 함께 자라며 우정을 키워왔던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충의 뛰어난 자질을 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를 신임하며 중요한 직책을 맡겨 의지하고 있었다. 이런 인재를 경덕왕이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

지리산 단속사 절 아랫마을이라 하여 남사마을이라 부르고, 지금도 남사마을은 오래된 마을로 체험행사 등을 이어가는 예담촌 등이 형성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신충은 이미 권력과 부귀명예를 탐하지 않으며 오로지 내적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이 깊어 산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살기를 원해왔었다.

무엇보다 신충이 부귀영화를 버리고 지리산으로 향하게 했던 것은 지리산 일대에서 일어난 소요를 평정하면서 지낸 한 달여 사이에 만난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신상의 모든 일을 정리하고 가볍게 지리산으로 들어온 신충은 산채를 꾸리고 산적생활을 하는 옛 친구를 찾았다. 지리산 단성 깊은 계곡에 어른과 부녀자, 아이들을 합해 300여 명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신충은 단성에서 자리를 잡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이 됐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어른들을 가르쳤다. 글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가르쳤다. 도적질을 못하게 하고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 인도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절을 짓고, 꿈에도 그리던 여인과 함께 경전을 읽으며 도를 닦는 수도생활을 이어갔다.

지리산 단속사가 있는 산청군 단성이 고향인 자흥 스님은 지리산 단속사의 복원을 꿈꾸며 단속사가 있었던 자리에 현대 단속사를 지어 법등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던 중 단성마을 산채에 큰 불이 났다. 아이들이 공부하다 잠든 산채에도 불이 옮겨 붙었다. 이때 신충은 비호처럼 불 속을 날아다니며 아이들을 구해냈다. 자신의 옷에도 불이 옮겨붙어 여기저기 화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불속에 남은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화재사건 이후에 단성마을 300여 명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신충을 신처럼 떠받들며 따랐다. 신충이 공부하는 절 단속사를 비롯 마을 전체가 수도하는 불교촌이 돼 나라에 큰일을 하는 훌륭한 일꾼들이 꾸준히 배출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 해석은 고운기의 ‘삼국유사’, 이범교의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 등을 참고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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