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더운 여름이 익어간다. 알곡들도 오랜만에 난 햇볕 아래 반가이 고개를 들고 볕 바라기를 하고 있다. 가까운 지인이 며칠 전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 아직 살날이 많다던 그가 홀연히 떠나버리다니. 울적한 마음에 하염없이 길을 걷는다. 한적한 한옥마을의 골목길이 무작정 걷는 이에게는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것 같다.

멀쩡히 활동하던 그가 어느 순간에 암 판정을 그것도 온몸에 다 퍼져서 더 이상 손 쓸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얼마나 황망했을까. 풍류를 즐기며 사람을 너무나 좋아해 하루해가 어찌 가는지 모르겠다고 좋아하던 그였는데. 몇 주라도 주변을 정리할 새도 없이 이승을 하직하고 다른 세상의 문을 열고 가버리다니. 하루하루 잘살아보려고 무진 애를 쓰며 살았던 그가 이 세상을 어찌 그리 쉽게 떠날 수 있었으랴. 성하의 계절, 꽃향기 가득한 인간이 사는 세상 끝마무리 해야 하는 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환갑을 갓 넘긴 그의 삶은 정말 많은 크고 작은 굴곡들로 채워져 있지 않았으랴 싶다. 하루하루 나이가 새롭게 다가온다.

인생의 고갯마루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결심이 흔들릴까 봐 동네방네 소문을 내면서 진행하고 있다. 오늘 나의 결정이 옳은 것인지는 마음먹기 나름이 아니겠는가 싶다. 누구는 오래 열심히 일했으니 편히 쉬면서 여행을 다니고 여유를 즐기라고 조언한다. 혹자는 전문성을 살려 사회에 봉사하면서 가늘고 길게 할 수 있는 즐거운 놀이터를 만들어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한다. 성격에 따라서 걱정하는 이, 어깨 두드리며 격려해주시는 분도 있다. “가늘고 길게”를 외쳐가며 “작은 보폭으로 지치지 말고 끝까지 즐겁게 걸어가자”라며 손잡아 주며 살갑게 다가오는 이들, 모두 좋은 마음으로 해 주는 염려가 아니겠는가. 남은 가족들과 짧은 생을 산 그를 보면서 남아 있는 나의 앞날을 어떻게 채워 나가야 할까 새삼스레 신중해진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색창연한 골목길을 정신 차리고 돌아본다. 오래된 기와를 이고 있는 담장 아래는 주황의 꽃들이 가득히 떨어져 있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능소화다. 꽃송이 하나하나를 살펴보니 모두가 예쁘다. 저 꽃들은 가장 어여쁠 때 떨어진 것은 아닐까. 예전 어디선가 읽은 능소화에 얽힌 전설이 떠오른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이고 자랑이고 자만이라고 전해진다. 어여쁜 능소화, 하룻밤 임금님과 정을 나눴다. 그 임금이 다시 자기를 찾아 주기만을 바랐으리라. 하지만 임금님은 그 정을 잊었는지 끝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임은 오지 않고 구중궁궐 후궁 처소에서 지낸 세월이 얼마나 길고 긴 기다림이었겠는가. 어리고 아리따운 여인의 기다림이 보는 이에게도 안타까움으로 다가갔겠는가. 궁녀들의 마음도 흔들어 여인의 죽음 뒤에도 기다림을 계속 이어갔다고 전해지는 능소화의 전설. 그래서일까. 능소화는 늘 담장 너머 조금이라도 더 넘어오려고 목을 빼고 얼굴을 뾰족이 내밀어 수줍은 모습으로 매달려있다. 기다리는 얼굴이 그대로 담겨있어 그리움이 보인다. 행여나 오실 님을 기다리며.

지인의 남은 가족, 그중에서도 그의 짝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리운 임을 기다리며 살아가겠지. 아니 하루하루를 울음을 삭이며 잊으려 애쓰면서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랴.

아픈 이를 그 아픔에서 구하고 싶어 의사라는 꿈을 꿨고 삼 십 삼 년이나 붙박이로 한 곳에서 울고 웃으며 살았다. 이제 다른 삶터를 마련하며 한 번도 정리하지 않았던 묵은 짐을 뺀다. 짐 정리를 하면서 보니 의과대학 시절의 책들, 인턴 때 손때 묻었던 수첩들, 읽다 귀를 접어둔 지인의 서책들이 가득하다. 이 병원에서의 세월. 강산이 세 번도 더 바뀔 만큼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나는 무얼 하면서 살았나. 스스로 물음표를 던져본다. 의술을 인술이라 굳게 믿고 한 사람이라도 나로 인해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하려고 밤낮으로 뛰었다. 힘든 줄도 모르고 순간 순간 환희를 느끼며 아이들과 아픈 이들과 함께 꼭 붙어서 살았다.

마지막 진료를 하는 날, 홀연히 웃으며 떠날 수 있기를 바라며 아이들의 얼굴을 살핀다. 오랫동안 진료한 아이네 가족이 찾아왔다. 손에는 상장이 들려있다. 왼손잡이인 큰 아이가 펜글씨로 감사장을 빼곡히 쓰고 그 옆에는 초상화를 그려 넣었다. 너무나 예쁘고 주름 하나 없는 얼굴로 만들어서 주기에 생명을 구해준 이들이나 받을 수 있는 감사장이라고 여기며 스스로 다짐한다. 살아있는 모든 날들, 조금이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리라.

앞으로 새롭게 펼치는 일들이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올려줄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요즘 아이들, 스트레스 쌓인다고 한다. 앞으로는 꽃 같은 아이들에게 자존감 팍팍 높여주는 그런 의사이기를, 함께한 날보다 함께할 날들이 더 많기를 소망한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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