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생명의 서」 (행문사, 1947)

험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지치고 힘들어 삶을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다. 일제식민지하에서 태어나 미래에 대한 꿈이나 희망이 없었던 엄혹한 시대의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부당한 차별과 터무니없는 부조리에 분노하다가 좌절하기 다반사였을 법하다. 먹고살기 힘든 육식동물보다 초식동물을 더 부러워할 수 있고, 늘 주위를 경계하며 포식자에게 쫒기는 초식동물보다 나무나 풀 같은 식물에 더 애정이 갈 수 있다. 가뭄이 들면 뿌리까지 타들어가는 식물보다 오히려 돌이나 흙이 신에게 더 축복받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듯하다.

사회 곳곳에 산재하는 부조리가 다정다감한 시인의 눈에 밟힐 건 뻔하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남에 대한 불신 그리고 삶에 대한 환멸이 마음을 무겁게 내려 누를 터다. 드디어 죽으면 바위가 되겠다는 뜻을 피력한다. 흔히 내가 죽으면 무엇이 되겠다고 말한다. 강렬한 의지나 처절한 비정의 심정을 결연히 나타내고자 함이다. 시 앞부분에서 말한 염원을 시 뒷부분에서 다시 부언한다. 그만큼 시인의 의지가 강하다. ‘내 죽으면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

죽어서 바위가 되리라는 다짐은 무엇 때문일까. 무심하고 냉정한 바위의 속성을 닮고 싶은 의지의 발로일 것이다. 사랑의 열병을 앓고 연민의 정에 시달리는 시인에게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서있는 바위는 이성적이고 모범적인 표상에 다름 아니다. 희로애락에 흔들리는 자신에게 듬직한 함묵의 바위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얼음 같이 차가운 지성의 상징이다.

바위는 결코 세월을 거부하지 않는다. 빗물에 몸이 깎여나가고 바람에 기꺼이 몸을 내어 놓는다. 변화무쌍한 감정을 말없이 극복하고 내면의 수양이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이면 그 내공은 끝 모르게 깊어진다. 마침내 생명도 초극하고 삶도 초월한다. 구름이 흘러가고 멀리서 뇌성이 들려와도 바위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꿈과 희망의 세계, 그 이상향이 실현된다손 감정에 휩쓸려 달뜨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 파멸이 다가온다손 흥분하거나 평정을 잃지 않는다.

‘내 죽으면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 참담한 현실에 속수무책 무력감을 느끼지만 굴복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대항하려고 하는 다짐이다. 피를 토하는 결연한 미래지향적 의지가 섬뜩하다. 일제식민지, 해방 후의 정치적 혼란, 처참한 민생고 등 끝없는 난장판을 몸소 겪으면서 마침내 초인으로 거듭나려 마음을 굳힌다. 죽어서 바위가 돼서라도 세상을 초극해보리라는 처절한 심정이 가슴에 오롯이 와 닿는다.

생명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허무와 삶의 부조리를 직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허무와 부조리를 초월하기 위한 의지가 비장하다.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유치환 ‘생명의 서’ 중에서)는 외침처럼.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