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꿈에 그리던 백수가 되기로 했다. “꼭 붙어 있어라”는 스승님 말씀을 지켜 33년을 한 곳에서 일했다. 이제 드디어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니 해묵은 짐을 꾸려야 한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인생 상반기 결산하는 날이 됐다. 책상 정리도 다 못 끝냈다. 남편은 백수 이브를 기념 하자며 재촉한다. 대충 정리하고 나머지는 싹 버리란다. 체에 거르듯 중요한 것만 챙기고 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잊어버리라고.

마누라 백수 된다며 동네방네 소문을 냈나보다. 소식 뜸했던 이들이 전화해준다. 코로나 끝나면 식사 한번 하자고. 아침 점심 저녁을 매일 뱅글뱅글 돌아가며 외식한다고 해도 모임 인원 제한이 있다면 몇 달은 걸려야 마무리 될 수 있을 정도다. 새롭게 다가오는 이들과 함께 시작할 새 일이 즐겁다. 잊지 않고 소식 전하는 이들, 인연 맺음을 기억하며 찾아와 하직 인사하는 직원들이 고맙다. 눈물 나게 웃기도 하고 때로는 부둥켜안으며 작별한다. 돌아보니 그래도 참 잘 지내왔다고 생각한다. 순간순간 즐거운 비명을 울려가며 살았으니.

고기 맛 좋기로 소문난 식당으로 향한다. 몇 번 그곳에서 가족 회식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남편이 말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나 ‘공사다망’한 사정으로 늘 혼자만 빠졌다. 그곳에 처음으로 방문해보니 어느새 그 집 단골이 된 동생네 부부와 남편이 앉아 있다. 새로운 출발을 축하한다는 문구가 적힌 꽃바구니를 받았다. 축하 멘트가 참으로 거창하다. “축 백수”

정다운 이들과 마주 앉아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살아온 것 같다. 무엇을 하느라 그리도 바삐 살았는지, 손안에 남은 것을 헤아려보지만, 딱히 모르겠다. 별탈없이 잘 지내왔다는 생각 밖에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이웃과 함께 그들의 마음을 읽으며 느긋하게 눈을 들여다보며 순간 순간을 소중하게, 여유를 즐기며 돌아보며 살아야지 다짐한다.

‘엄마 내 꿈은 엄마 같은 좋은 엄마가 되는 거야. 엄마 평생 나랑 같이 놀자.’ 지인의 카톡 프로필 사진 옆에 쓰인 문구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포토 티켓을 만들면서 좋았던 기억들을 모은다는 지인, 딸과의 정겨운 시간을 프로필 사진으로 꾸민 그가 부럽다. 내게도 소중한 아들들과 내 옆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한 사람이 있으니 이참에 포토티켓을 만들어 카톡 프로필을 장식해봐야지.

모든 것은 관계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어린아이, 사춘기에 있는 청소년들을 매일 대하면서 다양한 모습들과 마주했다. 자식의 아픔이 안타까워 울음을 속으로 삼키는 엄마들, 몸이 아파 억지로 병원에는 왔지만 짜증 가득한 얼굴의 사춘기 녀석들, 엄마 껌딱지로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어린 유아들, 모습은 다양하다.

친하게 지내는 지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녀의 남편은 10년 전에 실직했다고 한다. 그때는 너무도 막막해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그저 소처럼 묵묵히 일만 했다고 한다. 아이들의 학업과 생활을 책임지면서 먹고 살기 위해 잠시 쉬지도 못하고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지냈으리라. 그러다 보니 어느새 50대 중반에 이르렀다. 돌아보니 이뤄놓은 건 별로 없고 꽃다운 청춘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아 우울증이 찾아 왔단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은 삶을 살며 언제 어디서 얼음이 깨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불안감으로 살아온 10년 세월. 그저 생각해 보면 참 힘들고 고난의 연속일 것 같았으리라. 하지만 그녀의 얼굴엔 삶에 찌든 흔적이나 깊게 패인 주름이나 고민으로 찡그린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얼굴은 편안해 보이고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날, 그녀와 마주 앉아 차 한 잔 할 기회가 있었다. 궁금했지만 속에 넣어 뒀던 것들을 꺼내 물어봤다. 어찌 그런 상황을 견디며 그렇게 편안하고 밝게 미소 짓는 얼굴로 살아갈 수 있었느냐고. 그러자 그녀가 담담하게 이어갔다. 남편의 실직으로 가장으로 나서면서 남편에 대한 원망보다 승진과 가족을 위해 달려온 남편의 아픈 마음이 먼저 맘에 와 닿았다고. 큰 덩치에 울지도 못하고 삭히며 그저 가족들 앞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대로 있는 상황을 솔직하게 다 말했다고.

아빠의 실직으로 어려워질 생활과 이제 엄마가 가장이 돼 가정을 지탱해 나가야 한다고 말하니 아이들의 반응은 의외였단다. “아빠가 가장 힘들지. 우린 괜찮아. 엄마 아빠가 나쁜 마음 먹을까 봐 그게 걱정이야, 세상을 저버릴까 봐, 힘내자 엄마, 우리가 있잖아” 아이는 역시 어른의 아버지다. 어린 아이들이 그런 큰일을 너무나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며 놀라는 그녀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렸다,

집에 오니 “축 퇴사”가 또 나를 반긴다. 잭 다니엘 한 병과 함께. 우리 어린 막내가 준비한 백수 축하 이벤트다. 슬기로운 백수 생활이 되기를.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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