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어머니를 두고 출가해 의상대사의 10대 제자가 된 진정



▲ 의상대사가 태백산자락에서 문수보살의 계를 얻어 낙산사를 지었다. 의상이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 걸었던 해변길에 서 있는 낙산사 의상대.
▲ 의상대사가 태백산자락에서 문수보살의 계를 얻어 낙산사를 지었다. 의상이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 걸었던 해변길에 서 있는 낙산사 의상대.


삼국유사는 왕력과 기이, 흥법 등 9편 139가지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기이편은 삼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흥법 이하는 불교 설화 중심으로 엮었다. 마지막장의 효선편은 효와 불교적 선에 대한 신라와 고려시대 의식을 반영해 기술한 것으로 해석된다.



진정사 효선쌍미는 삼국유사 마지막 편제인 제9편 효선 다섯 가지 이야기 중 첫 번째 소개되는 글인데 신라시대 불교와 효에 대한 의식과 당시 생활양식을 짐작해볼 수도 있게 그려졌다.



또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시대에도 불교의 수행을 통해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기완성을 이루어가는 단면을 볼 수 있게 해 역사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이어 신라의 불교가 왕족과 귀족 중심의 지배이념에서 개인의 성불을 이뤄가는 대중불교로 전환되는 과정을 이해하게 한다.



효선쌍미라는 제목은 유교를 대표하는 효와 불교를 대표하는 의미의 선이라는 글을 병행해 신라인들의 조화로운 정신세계를 진정스님의 이야기를 통해 표현하려한 것으로 신라시대 신분제도 등 다양한 면을 생각하게 한다.



▲ 낙산사로 들어서는 입구에 무지개 형상으로 세운 홍예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절을 세우고 진정 등 제자들을 가르치며 설법했던 태백산 낙산사.
▲ 낙산사로 들어서는 입구에 무지개 형상으로 세운 홍예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절을 세우고 진정 등 제자들을 가르치며 설법했던 태백산 낙산사.


◆삼국유사: 진정사 효선쌍미

진정법사의 효도와 불법신봉 모두가 아름답다.

법사 진정은 신라사람이다. 속인으로 있을 때 군대에 예속돼 있었다. 장가를 들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 부역하는 여가에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집안에 재산이라고는 다리가 부러진 솥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하루는 승려가 문간에 와서 절 지을 쇠붙이를 구하자 어머니가 솥을 그에게 시주했다. 얼마 후 진정이 밖에서 돌아오자 그의 어머니는 그 까닭을 말하면서 아들의 뜻이 어떨까 염려했다.



진정은 기뻐하는 낯빛으로 “불사에 시주하는 그와 같은 일이 얼마나 다행한 것입니까? 솥이 없다 한들 또 무슨 걱정될 것이 있겠습니까”라며 질그릇 물동이로 솥을 삼아 밥을 지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 낙산사 창건 당시 삼층석탑이었는데 세조 13년인 1467년에 7층으로 조성했다. 보물 제49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낙산사 창건 당시 삼층석탑이었는데 세조 13년인 1467년에 7층으로 조성했다. 보물 제49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일찍이 그가 군대에 가 있을 때 사람들로부터 의상법사가 태백산에서 불법을 강설해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사모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한 후에 꼭 의상법사에게 의탁해 머리를 깎고 불도를 배우겠습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불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몹시도 빠르단다. 그러니 네가 말하는 효도를 마친 후라 하는 것은 너무 늦지 않겠느냐? 어찌 내 생전에 불도를 들었다는 말을 듣는 것만 하겠느냐? 삼가서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재촉했다.



진정이 “어머니 만년에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은 저 뿐인데 어머님을 버리고 어찌 차마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 하자 그의 어머니가 “이 어미 때문에 출가하지 못한다면 나로 하여금 지옥에 빠뜨림이니 비록 살아있을 때 풍성한 음식으로 공양하더라도 어찌 효도가 되겠느냐? 내가 남의 집 문에서 옷과 음식을 얻더라도 역시 내 명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니 네가 꼭 효도를 하려 한다면 그런 말을 말아라”라며 아들에게 길 떠날 채비를 서두르게 다그쳤다.





▲ 낙산사 동종은 조선 예종이 그의 아버지 세조를 위해 보시한 종으로 보물로 지정됐었던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이었으나 2005년 화재로 녹아내렸다. 낙산사 성보박물관에 녹아내린 모습 그대로 보관·전시되고 있다.
▲ 낙산사 동종은 조선 예종이 그의 아버지 세조를 위해 보시한 종으로 보물로 지정됐었던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이었으나 2005년 화재로 녹아내렸다. 낙산사 성보박물관에 녹아내린 모습 그대로 보관·전시되고 있다.




진정이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자 그의 어머니가 즉시 일어나 마련해 두었던 자루를 거꾸로 터니 쌀 일곱 되가 나왔다. 그날로 밥을 다 짓고 “네가 밥을 지어먹으면서 가면 더딜까 두렵다. 마땅히 내 보는 앞에서 한 되의 밥은 먹고 나머지 여섯 되 밥은 싸서 어서 떠나거라”고 말했다.



진정이 눈물을 삼키고 굳이 사양하며 “어머니를 버리고 출가하는 것만으로도 자식이 된 도리로서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며칠간의 끼니마저 모두 싸서 간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저를 무어라 하겠습니까”라며 세 번 사양하자 어머니는 세 번이나 권했다.



진정이 어머니 뜻을 어기기 어려워 길을 떠나 밤낮으로 길을 가서 3일 만에 태백산에 도착했다. 의상에게 의탁해 머리를 깎고 승려의 옷을 입고 제자가 되어 이름을 진정이라고 했다. 그곳에 머무른 지 3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의 부음이 전해졌다. 진정은 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들었다가 7일 만에 일어났다.



이를 설명하는 자가 말하기를 추모와 애통한 슬픔이 지극해 거의 견딜 수 없었으므로 정수로써 슬픔을 씻은 것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선정으로 그의 어머니가 환생하신 곳을 본 것이다”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이 선정에 들어가 명복을 빈 것이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미 선정을 마친 후에는 그 일을 의상에게 알려 드렸다.



의상이 그의 제자들을 데리고 소백산의 추동으로 가서 풀을 엮어 초막을 짓고 3천 명의 제자들을 모아 약 90일 동안 화엄대전을 강의했다. 의상 문하의 지통이 의상이 강의하는 대로 요지를 뽑아 두 권의 책으로 만들고 이름을 ‘추동기’라고 짓고 세상에 널리 폈다.

강의를 마치자 진정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이미 하늘에 환생했다”고 말했다.





▲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돌아와 선묘낭자의 도움을 얻어 도적들을 물리치고 세운 부석사의 건물이 소실되고, 고려시대에 중창한 국보 제18호 무량수전과 국보 제17호로 지정된 신라시대의 화려한 석등.
▲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돌아와 선묘낭자의 도움을 얻어 도적들을 물리치고 세운 부석사의 건물이 소실되고, 고려시대에 중창한 국보 제18호 무량수전과 국보 제17호로 지정된 신라시대의 화려한 석등.




◆새로 쓰는 삼국유사: 진정 스님의 효도

서라벌에 효국이라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청년이 있었다. 효국은 태어나자 말자 아버지가 병으로 죽고, 홀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했다.



효국의 어머니는 비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한 남편을 만나 어렵게 살림살이를 꾸려왔지만 성정이 반듯하고, 부지런해 마을에서 칭찬을 들으며 아이를 키웠다.



일찍 남편을 사별하고 여자의 몸이지만 작은 밭을 일구어 아들을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 글공부와 무술을 익히는데 게을리 하지 않도록 엄하게 다그쳤다.



다행히도 효국은 타고난 근골이 튼튼하여 무술을 익히기에 적합한 체형인데다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해 늘 뛰어난 점수를 받으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명을 받아 소백산에서 설법하던 곳이다. 무량수전 위쪽에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조사당.
▲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명을 받아 소백산에서 설법하던 곳이다. 무량수전 위쪽에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조사당.


효국은 성장하면서 어머니에게 효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공부와 무술 익히기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심지어 어머니가 지쳐 잠이 들면 혼자 일어나 밤이 늦도록 체력을 단련하고, 책갈피가 너덜너덜해지도록 글을 읽었다.



효국의 마음속에는 늘 한 가지 꿈이 자리하고 있었다. 장군이 돼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려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꿈이 있어 효국은 장군의 아들들과 가까이 지내며 장군이 되는 길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친구의 추천으로 군인이 됐다. 효국은 군인이 되어 제복을 입고 집으로 처음 돌아온 날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면서 “반드시 장군이 되어 나라의 기둥이 되고,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리겠습니다”고 다짐했다.

효국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 의상대사가 급하게 신라로 귀국할 때 대사를 흠모하던 중국의 선묘낭자가 용이 돼 호위하다 돌로 변해 지키고 있다는 부석.
▲ 의상대사가 급하게 신라로 귀국할 때 대사를 흠모하던 중국의 선묘낭자가 용이 돼 호위하다 돌로 변해 지키고 있다는 부석.


그러나 효국의 마음과 다르게 그가 속한 부대는 전쟁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부대에 소속되어 편안한 생활은 되었지만 효국이 원하는 크게 공을 세우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무술 실력이 뛰어난 효국이지만 그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군사들과 동료들조차 그의 뛰어남을 애써 자랑하지는 않았다.



무기고와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를 지키며 번갈아 순찰하는 일이 반복되며 세월이 자꾸 흘러 효국의 나이도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서른을 바라보게 되었다. 효국은 어머니의 머리에 흰머리가 늘어나는 것을 보며 서서히 조급증이 생겼다.



신라가 당나라를 축출하며 완전히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군사들의 일은 점점 더 편안해졌다. 담장을 쌓고, 도로를 보수하는 등의 부역에 동원되는 일이 전쟁에 나서는 일보다 많아졌다. 효국 또한 창칼과 방패를 벗어놓고, 삽과 괭이를 들고 농사꾼이 하는 일에 땀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을 한심스럽게 생각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황룡사에서 의상대사의 법회가 열리자 문무왕을 비롯한 대신들과 백성 5천여 명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루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리고 의상이 문무왕의 명을 받아 태백산에 절을 짓고 백성들을 위한 설법을 펼친다는 정보를 들었다.





▲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서 있는 보물 제249호 삼층석탑. 신라 문무왕 당시 부석사를 건립할 때 같이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삼층석탑.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눈길을 끈다.
▲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서 있는 보물 제249호 삼층석탑. 신라 문무왕 당시 부석사를 건립할 때 같이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삼층석탑.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눈길을 끈다.


효국은 이 나라에서 큰 인물로 대접을 받는 일은 군인이 아니라 승려가 되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그날 퇴근해 어머니를 뵙고 “어머님 저와 태백산으로 가서 의상대사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하는 일은 스님이 되는 일인 것 같습니다”라고 간청했다.



이에 그의 어머니는 “나는 이제 늙어 먼 길을 가기 어려우니 네가 훌륭한 스님이 돼 나라의 기둥이 되는 것이 좋겠다”며 “하루라도 망설이지 말고 길을 떠나라”고 재촉했다.



효국은 눈물로 어머니와 작별하고 태백산으로 가서 의상대사의 제자가 됐다. 그는 법명을 진정으로 받아 열심히 공부해 의상의 10대 제자 반열에 올라 신라의 불교를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국교로 성장하게 하는 초석이 됐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 해석은 고운기의 ‘삼국유사’, 이범교의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 등을 참고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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