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시였다, 천년을 닦은 길 끝의 오름/들깨밭 사잇길의 해풍을 맞받으며/꼭대기 등대를 돌아 인(in)섬에 다다르니//막걸리 두어 병쯤 인정으로 베풉니다/사진이나 한 장 찍어 추억으로 남기세요/주인의 공짜 인심에 구름 한참 올려보다//일천이 년 어여뻐라, 이 땅이 생겼음에/그 얼마의 값이라서 산술에 찌들까나/댕댕이 기는 담장에 돌 하나를 얹는다

「다층」(2018, 가을호)

서석조 시인은 경북 청도 출생으로 2004년 시조세계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매화를 노래함’, ‘바람의 기미를 캐다’, ‘각연사 오디’(현대시조100인선), 기행시조집 ‘별처럼 멀리 와서’ 등이 있다.

‘막걸리 두어 병쯤’에 나오는 비양도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에 있는 섬이다. 한림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3㎞ 지점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목종 5년인 1002년에 분출한 화산섬으로 기록돼 있다. 과거에는 대나무 군락이 무성해 죽도라 불렀다고 한다. 섬 모양은 전체적으로 원형이다. 최고지점은 114m의 분화구로 섬의 북쪽에 솟아 있으며, 남쪽은 대체로 평탄하다.

비양도에 첫 발걸음을 디딘 시의 화자는 대뜸 삽시였다면서 천년을 닦은 길 끝의 오름을 들깨밭 사잇길의 해풍을 맞받으며 걷다가 꼭대기 등대를 돌아 인(in)섬에 다다르게 된 것을 조근조근 들려주고 있다. 비양도가 해저에서 솟구쳐 오른 지가 천년을 훌쩍 지났으니 화자의 감회 또한 남달랐으리라. 그래서 막걸리 두어 병쯤 인정으로 베풉니다, 사진이나 한 장 찍어 추억으로 남기세요, 라는 주인장의 말을 듣다가 주인의 공짜 인심에 마음이 들떠 구름을 한참 올려다본다. 그 순간 어쩌면 비양도가 분출하던 그날의 놀라운 광경을 잠시 떠올렸을 법도 하다. 일천이 년 어여뻐라 이 땅이 생겼음에, 라는 셋째 수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비양도가 탄생한 1002년을 생각하면서 화자는 그 사실이 그저 흥미진진하고 어여뻐서 비양도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구에서 그 얼마의 값이라서 산술에 찌들까나, 라면서 화자는 댕댕이 기는 담장에 돌 하나를 얹는 것으로 마음을 건네며 여행객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천혜의 섬 제주도에 일천여년 전 또 하나의 작은 섬이 생긴 사건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발품을 팔아 섬을 돌면서 비양도가 품 안에 쏙 들어올 듯이 다정다감해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이렇듯 여행은 새로운 설렘을 선물한다. 더구나 처음 찾은 비양도는 이제 그의 마음의 벗이 될 만한 곳이다. 오래도록 가슴 깊숙이 묻어두고 한 번씩 들여다보는 정경이 되지 않겠는가.

그는 또 ‘가우도에서, 양지’라는 시조에서 가슴에 담아온 백련사 동백숲을 출렁다리 난간에다 오롯이 펼쳐놓고 신나게 햇살 받아라, 음지가 양지 되는, 이라고 노래한다. 이어서 넉넉하고 정연하고 햇살 바른 선창에서 되돌아가야만 하는 나그네들을 생각하며, 서성여 또다시 올 수나 있나 뭉클 솟는 그리움을 숨김없이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시동 켠 관광버스가 먼 길 채비 서두르다 아련히 울려 퍼지는 소야곡에 묻혀들자 발걸음 붙잡아 묶는 뒤안길 그 한 시절을 떠올린다. 끝으로 어디서 물색없이 맛집 간판 찾고 있나, 라고 반문하다가 시대를 역행하는 마성적 이 허기여, 하면서 노점상 파프리카를 한입 가득 베무는 것으로 전남 강진군 도암면 신기리 가우도 일정을 마무리 짓는다.

서석조 시인은 기행시조집 ‘별처럼 멀리 와서’를 야심차게 펴낼 정도로 여정에서 얻은 단상들을 형상화하는 일에 필력을 다한다. 그 속에는 곡진한 삶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어 감동을 안긴다.

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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