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24>손순이 자식을 땅에 묻다

발행일 2021-07-26 08:54:5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효자 손순의 밭에서 돌종이 나와…흥덕왕이 효의 표상으로 삼다



신라 흥덕왕때 홀어머니를 모시던 효자 손순이 왕으로부터 집을 하사받았다. 옛집을 절로 고치고 홍효사라 부르고 석종을 달았지만 후백제가 침입해 돌종은 가져가고, 빈터에 후손들이 홍효사를 복원해 관리하고 있다.


삼국유사 효선편에서 나타나는 신라시대 사람들의 효에 대한 의식은 지금의 생각과 분명 다른 점이 있다.

당시 효는 화랑들의 절대적인 신념으로 표현되는 나라에 대한 ‘충’은 물론 종교인들의 불교에 대한 ‘신심’보다 앞섰던 것으로 해석된다.

군인을 직업으로 어머님을 봉양하며 의상대사를 따라 불법을 공부하는 일을 뒤로 미루려했던 진정 스님의 경우를 보면 자연스럽게 충·법·효에 대한 신라인들의 우선순위가 짐작된다.

손순이 어머니를 배부르게 모시는 효도를 위해 아이를 땅에 묻으려 했던 손순매아편은 오늘날 사람들은 결코 아름답게 받아들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고려대 정운용 교수는 “궁극적으로는 효의 실천적 행위를 통해 세속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삼국유사 효선을 관통하는 기본주제의식”이라고 해석했다.

삼국유사 손순매아편에서 손순이 어려운 살림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땅에 묻기로 하고, 땅을 파다가 석종을 발견해 생각을 고쳐 자식과 석종을 집으로 가지고 왔다.

석종을 대들보에 매달고 쳤더니 은은한 종소리가 궁궐에까지 들려 흥덕왕이 연유를 듣고, 집 한 채와 해마다 50석씩 희사하도록 했다.

손순은 옛집을 희사해 홍효사라 하고 석종을 안치했는데 후백제군사들이 쳐들어와 석종은 소실됐다.

경주 소현리에 신라시대 지극한 효자 손순의 유허지에 조선말기 학자 허전이 찬술한 비문을 새긴 유허비가 전하고 있다. 경북도 기념물 제115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삼국유사: 손순이 자식을 땅에 묻다

손순은 모량리 사람으로 아버지는 학산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처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였다.

손순에게는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언제나 어머니가 잡숫는 것을 빼앗아 먹었다. 손순이 이를 민망히 여겨 그의 아내에게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모시기 어려운데 애가 어머니 드시는 것을 빼앗으니 어머님의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겠소. 그러니 이 아이를 묻어서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 드려야겠소”고 말했다.

이어 아이를 업고 취산 북쪽 들로 가서 땅을 파다가 난데없이 돌로 된 종을 얻었는데 너무나 신기했다. 부부는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잠시 나무 위에 걸고 두드려 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해 제법 들을 만 했다.

조선시대에 손순에게 내린 시호 문효공의 이름을 따라 후손들이 문효사를 세워 손순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아내가 “신이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도 이 아이의 복인 듯합니다.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며 만류했다. 아버지 또한 그렇게 여겨 아이를 업고 그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대들보에 매달고 쳤더니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를 듣고 주위의 신하들에게 “서쪽 들판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맑은 소리가 보통 종소리와는 비길 바가 아니다. 속히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

임금의 명을 받은 신하가 조사한 후 모든 사실을 왕에게 보고드렸다. 보고를 받은 왕이 “옛날에 곽거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으로 된 솥을 내렸고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니 땅에서 석종이 솟았구나. 전대의 효와 후대의 효가 천지에서 같은 본보기가 됐도다”며 집 한 채를 주고 해마다 메벼 50석을 주며 지극한 효를 숭상하게 했다.

손순이 살던 옛집을 희사해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홍효사라 했으며 석종을 모셨다. 진성왕 시대에 후백제의 사나운 도적들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다. 그 종을 얻은 곳의 지명이 완호평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달되어 지량평이라 부른다.

손순의 후손들이 홍효사 건물 옆에 석종 조형물을 상징적으로 조성해 세워두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소현리의 기적

손순은 흥덕왕 때 서라벌 북쪽의 소현리에서 홀어머니를 부양하며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가난한 농부였다.

손순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논밭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씨 착하고 효성 유별난 사람으로 소현 마을뿐 아니라 도심까지 소문이 자자한 효자였다.

손순은 늦둥이로 얻은 어린 자식과 나이 든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라벌 전지역에 3년째 가뭄이 심하게 들어 농가가 잇따른 흉작으로 어려움을 겪게 됐다. 먹을거리를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도시 전체 살림살이가 궁하게 되자 손순의 고민이 깊어졌다.

어쩔 수 없이 손순은 사는 집과 맞물려 있는 마지막 남은 밭을 팔기로 했다. 어머님을 잘 봉양하기 위해 마지막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낌새를 알아차린 손순의 어머님이 펄쩍 뛰면서 평소와 달리 아끼던 아들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텃밭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가산이다.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할 가보 중의 가보이니 팔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며 따끔하게 훈계했다.

신라시대 효자 손순이 살았던 마을로 서라벌보다 작은 고을이라 하여 소현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를 가진 마을 표지석.


손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답답한 마음에 울먹이며 “어머님 말씀은 모두 따르겠습니다만, 우리 식구들이 당장 먹을 끼니 걱정을 해야 합니다. 도대체 이 집과 밭을 왜 그렇게 목숨처럼 지키려하시는지요”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면서 “너의 4대 조부님이 가산을 탕진하며 이 집과 돌밭으로 부르는 밭을 넘기려 할 때, 조부님의 어머님께서 목숨으로 지킨 땅”이라고 설명했다. “이땅은 너희 손씨 집안을 잇게 할 명줄이라는 가훈 같은 말과 함께 전설 같은 이야기가 깃든 땅이라는 유언을 남기자 4대 조부님도 어쩌지 못하고 어머님의 명을 따라 집과 땅을 지켰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직전에서 시작됐다.

인도에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신라로 들어왔던 선승이 돌종을 메고 손순의 선조가 살고 있는 집을 찾아와 은신을 부탁했다.

손순의 선조 손정은 나라의 중책을 맡고 있던 대신이었으나 파벌을 일삼는 귀족들의 분쟁에 염증을 느끼고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있던 몰락해가는 귀족이었다.

효자 손순의 마을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손순 유허지 앞에 조성해 기념하고 있다.


그렇지만 손순의 선조 손정은 불교의 교리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던 터라 인도에서 온 선승을 극진히 접대하며 편안하게 머물며 공부할 수 있게 도왔다. 이에 선승은 밤이 깊어지면 손정과 부처님의 진리에 대해 날이 새도록 토론하기도 했다.

선승은 어느날 손순의 선조에게 조용히 말했다. “제가 들고 온 석종은 부처님의 말씀이 담겨있는 기물입니다. 훗날 반드시 이 집안의 대를 잇게 하고, 나라의 안녕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니 내가 죽으면 함께 묻어두고 아무에게도 알리면 아니됩니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선승은 석종을 끌어안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입적했다.

손순의 선조는 선승의 말대로 석종과 선승을 자신의 집과 붙어 있는 돌자갈밭에 아무도 오르게 묻었다. 봉분도 만들지 않고 평평하게 처리하고는 그 위에 여느 밭과 같이 이랑을 만들고 농사를 지었다.

손순유허지 유허비 옆에 수령 350여년이 된 팽나무와 회화나무가 보호수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그리고는 대대로 후손들에게 “이집과 땅은 부처님의 은덕이 있는 길지이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팔아서는 안된다”는 말을 전했다. 또 “돌밭의 돌은 치우지 말고 그대로 농사를 지어야 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돌종밭으로 부르던 밭 이름이 어느덧 돌밭으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내력이 있는 밭이니 지켜야 한다고 손순의 선조들은 대대로 어려움이 닥쳐와도 마을을 벗어나지 않고 집과 돌밭을 지켜왔다.

손순은 어머님의 엄명을 어기지 못하고 할 수 없이 흉년에 입을 덜기 위해 아내와 함께 “어머님은 다시 모실수 없지만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니 어머님을 위해 아이를 묻읍시다”라는 힘든 결정을 했다.

그 길로 밤을 틈타 아무도 모르게 손순 부부는 아이를 묻기 위해 돌밭으로 갔다. 돌밭을 괭이로 파내려 가는데 순간 빛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흰색 돌종이 나타났다. 가볍게 두들겨보니 소리가 청명했다.

부부는 어두운 곳에서 보아도 보통 물건이 아닌듯해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받아드렸다.

이후 다시 아이를 업고 돌종을 가지고 돌아왔다.

경주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지방도에서 소현리로 진입하는 입구에 손순유허지를 안내하는 표지석.


손순은 돌종을 대들보에 매달고 쳐보았다. 종소리가 은은하며 향기가 나는듯도 하고, 멀리 궁궐에까지 소리가 들렸다. 흥덕왕이 마음까지 청명하게 하는 종소리를 듣고 연유를 알아보게 했다.

딱한 소식을 들은 흥덕왕은 효자 손순에게 집을 지어주고 넉넉하게 먹고 살 수 있도록 매년 쌀 50석씩을 상으로 내려 효를 숭상하는 표상으로 삼게 했다.

손순은 석종을 매단 살던 집을 절로 고쳐 홍효사라 부르고, 고승을 모셔 많은 사람이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게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 해석은 고운기의 ‘삼국유사’, 이범교의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 등을 참고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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