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문화재<11>경산 보인농악||경상도 농사 문화 보여주는 농사

▲ 1970년대 경산 진량읍 보인농악단원 단체 사진.
▲ 1970년대 경산 진량읍 보인농악단원 단체 사진.
경북 경산의 한 작은 농촌 마을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농사굿이 있다. 이 굿은 한때 산업화의 물결 속에 잠시 사라지기도 했지만, 주민들에 의해 복원돼 현대 사회에 걸맞은 농악으로 재탄생했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41호 ‘보인농악’ 얘기다.

보인농악은 경상도 남부지방의 농사 문화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농사굿이다. 해방 전후 전국을 주름잡던 보인농악은 전국을 강타했던 새마을 운동의 여파로 1970년대 후반 잠시 중단됐다가 2007년 약 30년 만에 부활했다. 현재 보존회장은 이진우(74)씨다.

▲ 지난해 11월 열린 경산 보인농악 정기발표회에서 단원들이 북을 치고 있는 모습.
▲ 지난해 11월 열린 경산 보인농악 정기발표회에서 단원들이 북을 치고 있는 모습.
▲ 지난해 11월 열린 경산 보인농악 정기발표회에서 상쇠의 지휘에 맞춰 보인농악 단원들이 악기를 연주 중이다.
▲ 지난해 11월 열린 경산 보인농악 정기발표회에서 상쇠의 지휘에 맞춰 보인농악 단원들이 악기를 연주 중이다.
◆보인농악의 발상지, 보인마을은요

보인농악은 경산시 진량읍 보인1리에서 전승되고 있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는 하양군 낙산면 보인마을이라고 불렸다. 금호강 변 금호평야 언저리에 있으며, 50여 호가 거주하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보인마을 지명은 신라 시대 있었던 보인사라는 큰 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려 시대 여몽 항쟁 속에 마을 전체가 불탔지만, 약 500년 전 경주최씨가 마을에 머무른 후 곧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해진다.

풍수지리학에 따르면 보인마을의 형태는 ‘배설’로 우물을 여러 개 파거나 지붕에 기와를 얹으면 배가 침몰해 사공인 젊은 청년들이 죽는다는 무시무시한 전설이 내려져 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 전설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마을 전 가호를 초가집으로 통일했으며, 동네 우물 역시 한 곳만 팠다.

매년 섣달 그믐날이 되면 당 터에서 대내림(무당의 축원을 통해 대나 나뭇가지에 신을 내리게 하는 무속의례)을 받아 동제를 지낸 후 동네 가가호호를 돌며 지신을 밟았다. 이런 종교적 의례에 음악이 빠질 수 없었고, 농악은 마을 사람들의 흥과 한, 농사일의 고됨과 종교적 의식까지 표현하는 수단으로써 보존·발전해 왔다.

이런 터부사상이 강했던 마을은 산업화 시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과 새마을 운동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보인마을은 농촌 근대화 시범 마을로 선정됐고, 1980년대 홍보부락으로 지정, 급격한 근대화를 겪으면서 보인마을의 유·무형 전래 문화인 보인농악은 잠시 사라지게 된다.

▲ 올해 5월 경산 자인단오제에 참가한 보인농악단의 모습.
▲ 올해 5월 경산 자인단오제에 참가한 보인농악단의 모습.
◆3전4기…복원을 위한 노력

보인농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데는 1990년대 이 마을 주민들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 보인농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악기를 연주하고 상모를 돌리던 단원들은 고스란히 마을에 생존해 있었다.

당시 단원이었던 음악교사 박순범씨는 보인농악에 대한 향수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보인농악을 복원키 위해 기본 가락보를 만들었고, 이를 박용호씨가 전승시키고자 노력했다.

30년간 사라졌던 전통을 현대 사회에 이르러 되살리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보인1리는 주민들의 이농과 심각한 노령화로 농악 전수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진량 부림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보인농악을 3년간 전승했지만, 학부모들의 반대로 결국 중단됐다. 대기업 사원들을 대상으로 전승 교육을 진행해 일부 성과를 거뒀지만, 데모에 농악이 동원되는 것을 아니꼽게 본 회사 측의 반대로 이마저도 중단되는 아픔을 맛봤다. 끊어져 가는 맥을 잇는 일은 진량농악대에서도 이어졌지만, 쉽지 않았다.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2007년 경산시 농악 보존연합회가 결성되면서다. 연합회는 경산지역의 농촌 문화가 가장 잘 남아 있는 봉인농악의 가락과 진법을 전승코자 나섰고, 급결성된 농악단은 2008년 경북 농악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성과를 거뒀다.

현재 완전히 궤도에 오른 보인농악단의 단원 수는 70여 명에 이른다. 보인농악단은 오늘도 전통의 계승과 지역사회 문화발전, 건전한 놀이문화 정착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 4대 상쇠 임두식씨.
▲ 4대 상쇠 임두식씨.
▲ 5대 상쇠 김대근씨.
▲ 5대 상쇠 김대근씨.
◆보인농악을 지켜온 사람들

조선 시대부터 해방 전까지 보인농악은 동제를 지내면서 고사 굿과 지신밟기 굿 형태로 전해 내려왔다.

1대 상쇠(농악에서 꽹과리를 치는 주자로 가장 앞에서 전체 음악을 지휘하는 역할)였던 이동개씨는 모내기와 논매기 등에서 농사굿을 착안,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보인농악을 현 12마당 형태로 정립시킨 인물이다.

이어 2대 상쇠 김판언씨대에 이르러 해방 후 각종 대회에 출전해 전국 대회 3회, 도 대회 2회 등 총 5회 우승을 달성, 명실공히 경산 대표 농악단으로 우뚝 섰다.

중단 전 마지막 상쇠였던 3대 상쇠 이융신씨는 장 굿 및 각종 행사의 초청 공연을 담당하며 맥을 이어왔지만, 조국 근대화 물결에 밀려 빛이 바랬다.

1990년대 들어 보인농악 복원을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다.

2000년대 중반 4대 상쇠 임두식씨가 진량 노인 농악단을 창단, 명맥을 잇고자 했다. 다음에 진량의 청년들이 주축이 돼 보인농악단을 창단했다가 2010년 결국 해단되고 말았다.

그 후 단장 박용호가 경산조폐공사 농악 동아리와 진량 한성레미콘 직장인들과 하양 문화원 농악교실 단원들로 다시 보인농악단을 재정비했다.

다시 창단식을 갖고 경산 자동차 고등학교 농악 동아리와 하양 무학중·고등학교 농악 동아리에 상모를 전수하며 새로운 단원을 모집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현재 5대 상쇠 김대근씨가 맡아 오고 있으며 단원들은 대다수가 직장인으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취미생활로 보인 농악을 하는 중이다.

현재는 진량초등학교와 진량중·고등학교 그리고 부림초등학교의 도움으로 청소년 농악 단원 확보와 전수에 힘쓰고 있다. 인근 대학의 동아리들과 또한 경산의 기업체와 협조해 사원들의 취미생활로 농악 단원을 모집, 보인농악 전승에 매진할 계획이다.

▲ 올해 5월 열린 경산 자인단오제에서 보인농악단원들이 글자를 만들며 한판 놀고 있다.
▲ 올해 5월 열린 경산 자인단오제에서 보인농악단원들이 글자를 만들며 한판 놀고 있다.
◆마을 주민 전체가 농악단원…흥겨운 12마당

보인농악의 악기 구성은 꽹과리(쇠), 징, 장구, 북, 벅구(소고) 등으로 농민, 포수, 양반, 각시, 난쟁이 등을 각각 연기했다. 마을의 청장년 28명가량이 순수한 농사굿을 했고, 전 주민이 단결해 뒷바라지했다.

마을 사람들은 채복(색깔이 고운 옷)을 직접 만들면서 한마음으로 농악의 전승에 관심을 가졌다. 주민 전체가 농악단원이었던 셈이다. 대회에 나가서 다른 팀이 좋은 것을 한다면 그것을 보고 배워 새롭게 만들기도 했다.

징, 장구, 북 연주자들은 흰색으로 만든 꽃이 달린 고깔을 썼다. 꽹과리 연주자는 화려하게 장식된 상모를 쓰고 농악단을 이끌었다.

이 상모도 마을 주민들이 모여 만든 것이다. 벙치(벙거지의 방언)에 나무로 깎은 징자를 꽂았다. 이를 무명실로 노끈을 만들어 졸라매고 납을 달았다. 철사 뒤에 달고 그 끝에 흰 종이를 달면 상모가 완성된다. 긴 상모는 짚으로 만들었다. 짚을 꽈 소쿠리처럼 만들어 머리가 쏙 들어가도록 하고, 납도 더 묵직하게 했다.

가락은 덩더쿵 가락인 판굿가락의 섬세함과 빠른 자진가락이 조화를 이룬다.

특유의 ‘별 다드래기 장단’과 ‘덧배기 장단’의 춤쇠 가락은 화려하고 웅장하다. 북 가락은 아주 웅장하고 흥이 난다. 채복은 쇠와 징만 쌍 채복 대신 왼쪽 어깨에만 두르는 외 채복을 했다. 고깔은 흰색 일색이며, 잡색에 난쟁이가 출연하는 게 특징이다. 특히 상모가 유명해 양상이 발달했고, 동거리 상모는 남사당 외는 보기 힘든 보인농악의 특징이다.

보인농악은 전형적인 모의농사굿으로, 다른 지역과는 달리 글자놀이가 발달했다.

마당 굿은 12마당으로 이뤄지는데, 입장 굿은 긴 팥굿가락으로 흥겹게 입장해 2줄로 서서 본부석에 인사한다. 다시 원진을 만들어 판굿가락으로 놀다가 흥가락 마치 땔 때 구부렸다 소고를 오른발로 차면서 한 바퀴 돈 뒤 관중에게 인사한다.

농사일을 시작하기 전에 일꾼들을 격려하기 위한 ‘화전굿’은 주민들이 화전놀이(마을 잔치)하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밖에도 △논의 형상을 ‘흙(土)’으로 표현한 ‘흙토(土)자 굿’ △논에 물 가두기를 형상화한 ‘물 수(水 )자 굿’ △모 찌기, 모심기, 논매기, 벼 베기 등을 형상화한 ‘농진 굿’ △소나기가 내린 후 무지개가 서는 것을 표현한 ‘무지개 굿’ △밭농사를 흉내 낸 ‘밭 전(田)자 굿’ △논농사를 끝낸 후 보리 갈이를 형상화한 ‘곰베 정(丁)자 굿’ △농사가 모두 끝나고 농사꾼들이 개인기를 자랑하면서 신명 나게 한판 노는 ‘판 굿’ △마당에 펴 놓았던 덕석자리를 겨울 농한기 때 실경에 말아 걸어 두는 것을 표현한 ‘덕석 말이 굿’ △추수 감사제 ‘태극 굿’ △동거리 굿 등으로 이어진다.

▲ 지난 7월14일 진량읍사무소 강당에 모인 보인농악 단원들이 오와 열을 맞춰 연습하고 있다.
▲ 지난 7월14일 진량읍사무소 강당에 모인 보인농악 단원들이 오와 열을 맞춰 연습하고 있다.
▲ 지난 7월14일 진량읍사무소 강당에 모인 보인농악 단원들이 오와 열을 맞춰 연습하고 있다.
▲ 지난 7월14일 진량읍사무소 강당에 모인 보인농악 단원들이 오와 열을 맞춰 연습하고 있다.
◆전통의 보존, 그 책임의 무거움

이렇게 주민들이 모여 대회 등을 준비하면서 마을 화합에 농악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대 사회에 이르러 농악은 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표현했던 예전과는 다른 의미를 띠고 있다. 지역 색깔과 전통 계승과 더불어 하나의 예술 문화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모든 것이 현대 사회에 맞게 재해석되고 있지만, 보인농악만의 ‘흥’은 여전히 날 것 그대로다. 도시 사람들에게 지금은 사라진 농촌 사회의 애환과 가치 전달을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힘들게 복원한 보인농악이지만 정작 전수자를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전수관이 없이 연습실을 이리저리 빌리는 형태로 운영돼 집중적인 교육이 힘든 탓이다. 농악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도 부족하다. 지난해부터 확산한 코로나19로 전국 대회들이 사라진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보존회장 이진우씨는 “전통의 보존을 넘어 현대 사회에 맞게 보인농악을 재편하려고 노력 중”이라며 “농악은 운동, 취미, 악기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다. 젊은이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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