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을 불끈 쥐면/ 돌이 되었다/ 부르르 떨면 더 단단해졌다// 주먹 쥔 손으로는/ 티끌을 주을 수 없고/ 누구한테 꽃을 달아 줄 수도 없다// 꽃을 달아 주고 싶은 시인이 있었다// 산벚꽃 피었다 가고/ 낙엽이 흰 눈을 덮고 잠든 뒤에도/ 꺼지지 않는 응어리/ 그만 털자, 지나가지 않은 일도 터는데// 나무들 모두 팔 쳐들고 손 흔드는 숲에서/ 나무 마음을 읽는다// 주먹을 풀 때가 되었다

「시인수첩」 (문학수첩, 2018 겨울)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나는 것이 세상살이다. 언뜻 보면 무심한 것 같다가 어찌 보면 독을 품은 것 같다. 때론 아는 척하며 미소 짓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기도 한다. 억장이 무너지고 원한이 사무쳐 꼭 보복을 하고 싶을 만큼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 그만 아무데나 주저앉아 울고 싶고 그냥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지만 사랑하는 어버이나 자식이 눈에 밟혀 모진 세상을 견뎌내기도 한다.

당한 일이 분하고 원통하면 복수를 맹세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억울하게 당한 것을 반드시 되갚아주고자 하는 굳센 의지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표시로 주먹을 불끈 쥔다. 주먹을 더 세게 쥐면 복수를 더 빨리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주먹을 너무 세게 쥐어 몸까지 부르르 떨기 일쑤다. 그러다 보면 마치 복수가 곧 이뤄질 것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구체적인 로드맵을 애써 실행하기보다 심리적 성취감에 도취돼 습관적으로 주먹만 쥐면서 만족하는 일도 없지 않다.

감당하기 힘든 세파를 극복하고자 주먹을 쥐고 전의를 다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 정도의 시련이나 고난에 무너질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남은 물론 스스로에게도 증명해보이기라도 하듯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떤다. 그렇게라도 하면 없던 용기도 솟아나고 나태하고 안이한 마음을 다잡게 되는 법이다. 느슨한 마음을 긴장시키고 강인한 정신력을 유지해주는 물리적 방법으로 유용하다.

손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위대한 도구다. 손을 거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 수저를 잡고 밥을 먹고 문자를 써서 자신의 뜻을 전달한다. 각종 기계를 만들고 트랙터나 차를 운전하며 농사를 짓고 가축을 사육한다. 허나 주먹을 꼭 쥔 손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티끌같이 작은 것이라도 잡을 수 없다. 그렇다. 복수를 하려고 한다면 불끈 쥔 주먹을 풀어야 한다. 힘든 난관을 이겨내고 목표를 성취하려고 한다면 주먹부터 풀어줘야 가능하다.

화려한 꽃도 때가 되면 기꺼이 지고 무성한 나뭇잎도 때가 오면 미련 없이 떨어진다. 그런 가운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자연의 섭리다. 숲에 서있는 나무를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 비워내야 비로소 얻는 법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꽃을 달아주고 싶다면 먼저 주먹을 펴야 한다. 주먹 쥔 손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주먹을 펴고 손을 비워야 꽃을 딸 수 있다. 자유로운 빈손이라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달아줄 수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해 독한 마음을 품을지라도 세월이 가면 마음을 풀고 잊어버리는 것이 되갚고 이기는 길이다. 힘든 일에 맞닥뜨릴 땐 굳세게 마음먹어야 하겠지만 때가 되면 푸근하고 유연하게 생각해야 역경을 돌파할 수 있다. 채우려 한다면 비워야 한다. 나무가 하는 일을 인간이 못 할 바 없다. ‘그만 털자.’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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