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는 헌법 21조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가지는 권리로서 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한 기본권으로 볼 수 있다.

개인의 사상과 의사 표현은 개인의 인격 향상과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며 개별적 의사가 모여 여론을 형성한다. 여론이 공론화되고 조직화될 때 그것은 국가의 정치 제도 속에 자리하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개인적’ 표현의 자유로서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단적’ 표현의 자유로서 집회, 결사의 자유로 나눠 볼 수 있다. 언론과 출판으로 예시돼 있지만 의사 표현과 전달의 매개체는 어떠한 형태이든 가능하며 그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 우리 헌법재판소의 입장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 헌법 21조 4항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공중도덕, 또는 사회윤리를 침해해서는 아니 되며 침해한 때에는 피해자의 배상 청구를 인정하고 있다. 더불어 헌법 제37조에 의해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해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권리 행사는 반드시 책임이 동반됨을 헌법 조문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터넷과 SNS의 등장은 표현의 자유의 허용과 한계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흔히 말하는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도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개인에 대한 테러는 무모함을 넘어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예인과 언론이나 방송에 노출된 개인을 향한 ‘악다구니’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행동인 것처럼 포장되고 있다. 수많은 연예인과 개인들의 자살은 이러한 악의적 댓글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자유 보장이라는 형식적 측면에 치중한 무분별한 댓글과 사회관계망 속에서의 글들은 그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이라는 규범적 비판과 법적 제재에 자유로울 수 없다. 개인의 언행이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전파성을 타게 될 때 그 내용적 가치에 대한 판단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이다. 공공의 이익과 민주주의 원칙, 헌법 가치와 문학, 예술의 내적 요구에 부합하느냐가 그 기준으로 볼 수 있다.

표현의 자유가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 논리와 결합될 때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각 진영의 이념적 가치가 표현의 자유로 위장돼 오직 국가와 공익을 위한 일인 것처럼 왜곡돼 나타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패러디한 ‘더러운 잠’과 최근에 있었던 전 검찰총장 윤석렬 부인에 대한 ‘쥴리 벽화’가 그것이다. 진보 진영에서는 대중의 관심을 기발하게 표현한 최고의 걸작이라고 추켜세우기 바쁘다. 보수 진영에서는 보복적 차원에서 다른 진보 인물을 물색하고 수치스럽고 낯 뜨거운 표현으로 그를 조롱한다.

사실 여부는 이미 우선순위에서 멀어진지 오래다. 의뭉스럽고 교묘한 언행으로 얼버무리면서 사법당국의 결정을 기다려 보자며 법 뒤에 숨는다. 타인의 기본권 침해가 전제된 표현이라면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닌 방종과 폭력임에도 개의치 않는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수단을 통한 지적 비겁함이자 정치적 교활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정치적 조롱과 풍자가 가미된 표현의 자유를 무조건 억압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절대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국민 개개인의 수단이기도 한 정치적 풍자는 분명 긍정적 기능도 가지고 있다. 정치를 비틀어 조롱하고 풍자함으로 국민들의 카타르시스와 정치권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두려운 것은 SNS를 통한 표현이 사생활의 침해와 ‘훔쳐보기’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무비판적인 몇몇 언론의 확대 재생산은 전 국민을 ‘관음증’ 환자로 만들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왜곡된 표현이자 폭력의 다른 모습임에도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비굴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개인이나 언론이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국가 권력과 절대 군주로부터 피로 되찾은 자유가 어느새 타인을 억압하고 조롱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의 허용 범위와 한계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자정 작용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김시욱 에녹 원장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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