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에 둘러싸인 한적한/ 마을에 해가 지면/ 달빛이 어둠을 지우고/ 귀뚜라미 고요 속에 잠들 때/ 치성 드리는 할매 손은 바쁘시다.// 달빛 가득한 허공을/ 드비 날아오르는 멧새 그늘에 놀란/ 애련한 궁노루 눈가에/ 짝을 찾는 그리움이 고인다.// 초가 마당에 달빛이/ 서설처럼 흩날리면 불면이 귀를 열고/ 이 산 저 산 “솔적당”/ 소쩍새의 달빛 연가 천년 넋이 붉다.// 재 너머 아련한 기적이/ 사린 마음을 훔쳐내는 밤에/ 달빛이 푸른 솔잎에 영롱한 수를 놓아/ 눈길 사로잡는 그림 한 폭!// 가슴 벽에 걸어둔 달빛 풍경….

「가슴 벽에 걸어둔 달빛 풍경」 (북랜드, 2021)

세월은 쏜 살같이 지나가고 빛바랜 기억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 묵은 벗은 가슴 깊이 둥지를 틀어 들어앉고 낡은 기억은 비 온 후 초목처럼 귀를 쫑긋거리며 날을 세운다. 익숙한 산천은 날이 갈수록 오히려 싱싱하다. 추억은 낯을 가리고 아름다움은 숙성된 다음에야 가슴 벽에 걸린다. 눈은 어둡고 귀는 무뎌져, 보는 것은 침침하고 듣는 것은 먹먹하다. 하지만 보고픈 모습, 듣고픈 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세월이 가는 것은 비록 슬프지만 가슴 벽에 걸린 그림은 피곤한 몸을 지탱해주는 충직한 버팀목이다.

수구초심은 지칠수록 힘을 얻는다. 청산에 둘러싸인 고향 마을이 눈앞에 선하다. 해가 진 다음에도 달이 떠올라 외롭지 않다. 천지신명께 기도하는 할머니가 달빛 아래 고고하다. 가을 밤 귀뚜라미마저 조용히 숨을 죽인다. 파득거리며 창공을 날아오르는 멧새의 그늘에도 겁먹은 채 먼 산을 바라보는 가녀린 궁노루는 천진무구한 아기처럼 아리도록 가련하다. 궁노루가 달빛을 맞고 달빛이 궁노루를 찾는 은은한 밤이다.

푸른 달빛이 상스러운 눈처럼 교교히 내리고 잠 못 드는 초가의 마당은 적막 속에 살아 숨 쉰다. 삽살개는 꼬리를 흔들며 부엌에서 나오는데, 앞산 뒷산 소쩍새는 일편단심으로 애타게 짝을 부른다. 언덕 너머 멀리서 기적 소리 아련히 들려오는 날이면 가슴에 품은 마음을 들킨 듯 얼굴을 붉힌다. 달빛이 푸른 솔잎에 내려앉은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고향의 풍경이다. 그것은 가슴 벽에 걸어둔 달빛 풍경이다.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을 발견하면 누구나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집에 가지고 가서 거실이나 침실 벽에 걸어두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두고두고 감상하고 싶은 것이다. 유년 시절 고향의 풍경은 어떤 화가의 그림보다 더 진한 감동을 준다. 평생토록 ‘눈길 사로잡는 그림 한 폭’이고, ‘가슴 벽에 걸어둔 달빛 풍경’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생생히 각인되는 그리움이고 죽는 날까지 싫증나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달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도록 인도해준 부모와도 같고 청산은 푸른 꿈을 심어준 훌륭한 스승과도 같다. 멧새 그늘에 겁먹은 궁노루가 되기도 하고 앞산 뒷산에서 피나게 울어대던 소쩍새가 되기도 한다. 산 너머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오는 날 밤이면 미지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시인은 신열을 안고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할 터다. 그 꿈의 성취와 관계없이 그 시절 그 추억은 소중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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