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13대 미추왕, 김씨 최초의 왕이 되어 죽어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성군



▲ 신라 13대 미추왕의 릉은 대릉원 내부 가운데 위치해 있다. 김씨 최초로 왕이 되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베푸는 왕으로 전해지고 있다.
▲ 신라 13대 미추왕의 릉은 대릉원 내부 가운데 위치해 있다. 김씨 최초로 왕이 되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베푸는 왕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1천 년의 왕조는 박혁거세왕을 시작으로 박씨 10명, 석씨 8명, 김씨 38명의 모두 56명의 왕이 나라를 이었다.

처음 박씨 왕조에 이어 석탈해가 석씨로는 처음 왕위에 올랐고, 김알지가 석탈해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을 것으로 지목 받았지만 박씨가 왕위를 이어가도록 양보를 했다.

김씨는 13대 미추왕이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다시 석씨로 왕위가 이어졌다. 미추왕도 석씨 왕손의 사위였기 때문에 왕좌에 앉을 수 있었다.

물론 김알지로부터 시작된 김씨들의 세력이 커진 배경도 크게 작용했다.

미추왕에 이어 김씨들이 왕위를 바로 이어받지 못한 이유도 박씨와 석씨 성을 가진 씨족들의 세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추왕은 김씨로 최초의 왕이 됐고, 김씨 왕가 세습체제의 꽃을 피우는 씨앗으로 기능했다.



진한지역에서 두드러진 세력을 자랑하며 처음 왕을 옹립했던 육부촌장들인 이씨, 정씨, 손씨, 최씨, 배씨, 설씨의 여섯 성씨는 끝까지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미추왕은 김씨로 최초의 왕이라는 기록보다 백성들을 위한 특별한 사랑을 죽어서까지 베풀었던 성군으로 더욱 유명하다.



▲ 미추왕릉은 대릉원에서도 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일반 고분과 다르게 울타리를 두르고 출입문을 세웠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 미추왕릉은 대릉원에서도 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일반 고분과 다르게 울타리를 두르고 출입문을 세웠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계림

계림은 신라 천년을 지탱해온 왕궁 월성과 바로 연접해 있는 아담한 정원 같은 숲이다. 월성의 서쪽에 위치해 시림으로 불리며 오래된 나무들이 워낙 무성하게 자라 대낮에도 컴컴할 정도였다.



석탈해왕 9년 봄 이른 아침에 시림에서 닭 울음소리가 신라 대신 호공의 귀에 크게 들렸다. 호공은 날이 밝지 않아 어둠이 깔린 숲으로 닭 울음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숲 한쪽 고목에서 흰 깃털이 유난히 눈부신 닭이 홰를 치며 울고 있었다. 그 닭이 앉아있는 나뭇가지 옆에는 금빛 상자가 빛을 발하며 걸려 있었다.



호공은 정신없이 이 광경을 바라보다가 왕에게 뛰어가 사실을 보고했다. 탈해왕은 “이것은 분명 나라에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며 호공을 앞세워 시림으로 달려왔다. 금빛상자는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신하들이 상자를 나무에서 조심스레 내리자 닭은 사라져버렸다. “어서 상자를 열어 보아라”는 명에 따라 신하들이 상자를 열자 안에서 아이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왕이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니 잘 생긴 사내 아이가 웃고 있었다.





▲ 월성과 연접한 계림에 김알지 탄생 설화를 기록한 비를 보호하는 계림비각이 있다.
▲ 월성과 연접한 계림에 김알지 탄생 설화를 기록한 비를 보호하는 계림비각이 있다.


탈해왕은 기뻐 아이를 안으며 “하늘이 내게 아이를 보내주신거야. 이 아이를 아들로 삼아야 겠다”며 아이를 태자로 삼고, 숲 이름을 계림으로 부르게 했다. 이어 탈해왕은 그때부터 나라 이름도 계림국이라 칭했다.



금빛상자에서 나왔다고 해 아이의 성을 김(金)으로 하고, 이름은 지혜롭다는 뜻의 알지로 지었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삼국유사 등에 역사적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다.



▲ 대릉원 남쪽에 미추왕과 문무왕, 경순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숭혜전.
▲ 대릉원 남쪽에 미추왕과 문무왕, 경순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숭혜전.


◆김씨 최초의 왕

김알지는 이름 그대로 지혜로울 뿐 아니라 마음이 너그러우며 체격도 크고 훌륭하게 자랐다. 석탈해왕은 죽으면서 김알지가 왕위를 잇도록 유지를 남겼다.



알지는 왕의 유지와 다르게 3대 유리왕의 아들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박씨와 석씨의 세력이 워낙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원만하게 경영하기 위해 박씨가 그대로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김알지는 5대 파사왕과 6대 지마왕의 왕비를 김씨 자녀로 간택하게 했다. 그로부터 왕궁에 김씨의 세력을 뿌리내릴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4대 석탈해왕 이후 9대 벌휴왕이 석씨가 왕위를 잇는 계보를 형성해 16대 흘해왕까지 8명의 석씨 왕을 배출했다.





▲ 계림에는 천년고목 100여 그루가 아직도 숲을 이루고 있다. 수령 1천300년을 넘긴 회화나무의 본 줄기는 고사하고 곁가지가 자라고 있다.
▲ 계림에는 천년고목 100여 그루가 아직도 숲을 이루고 있다. 수령 1천300년을 넘긴 회화나무의 본 줄기는 고사하고 곁가지가 자라고 있다.


12대 첨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사위였던 미추가 13대 왕으로 등극해 김씨로서는 최초로 왕이 됐다.

박씨와 석씨에 이어 김씨도 신라의 왕좌에 오르는 3성 구도를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석씨 계보에서는 박씨들을 경계하기 위해 비교적 세력이 약하고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쉬웠던 김씨를 왕좌에 앉혔다.



미추왕은 22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백제 봉산성을 공격해 나라의 영토를 넓히고, 김씨 세력의 기반을 한층 탄탄하게 다졌다.



▲ 월성의 서쪽 계림에는 지금도 수령 100년을 넘긴 노거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맥문동 등의 화초들이 공원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 월성의 서쪽 계림에는 지금도 수령 100년을 넘긴 노거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맥문동 등의 화초들이 공원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석씨 왕조

신라는 박씨 왕조에 이어 9대 벌휴왕부터 13대 미추왕을 제외하고 나해, 조분, 첨해, 유례, 기림, 16대 흘해왕까지 석씨들이 172년 간 왕조를 이었다. 따지고 보면 미추왕도 석씨 가문의 사위로 석씨들의 집권시기로 분류해도 큰 오류라고 할 수 없다.



석씨로 처음 왕이 되었던 인물은 4대 석탈해왕이다. 탈해왕의 23년을 더하면 석씨들의 왕좌는 195년으로 신라 1천 년의 20%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벌휴왕은 바람과 구름으로 점을 쳐서 물난리, 가뭄, 풍년과 흉년을 미리 짐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던 신인이었다. 왕은 또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도 성품을 파악할 수 있어 백성들이 왕을 성인으로 존경했다.





▲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를 모시는 사당 계림세묘. 대릉원과 연접한 남쪽에 위치해 있다.
▲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를 모시는 사당 계림세묘. 대릉원과 연접한 남쪽에 위치해 있다.




벌휴왕은 군사를 키워 백제를 공격해 영토를 넓히기도 하는 등으로 힘이 강한 나라로 키웠다.

10대 내해왕은 얼굴이 잘생기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전술에도 해박해 3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포상 8국을 정벌하고 봉산성을 쌓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했다.

석탈해가 김알지를 나라의 동량으로 키웠고, 석첨해왕의 사위 김미추가 왕위에 올라 17대 내물왕부터 본격적인 김씨 왕조가 맥을 이어가게 됐다. 석씨가 김씨를 왕손으로 키워내는 텃밭이 된 셈이다.





◆신라 지킴이

미추왕은 김알지의 7세손으로 왕궁에서 귀족으로 성장했다. 왕궁에서 나라의 대소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직접 많은 실무를 감당하면서 왕으로서의 수업을 착실히 익혀왔다.



미추왕은 왕위에 오르자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마련했다.





▲ 계림세묘로 들어가는 출입문.
▲ 계림세묘로 들어가는 출입문.


가장 먼저 석씨와 박씨 성을 가진 대신들을 고르게 등용하고, 총명한 김씨 후손도 대신으로 골라 협의체를 구성했다. 이어 남당이라는 건물을 정비해 나라의 중요한 일을 협의하는 일은 이곳에서 진행했다.



미추왕은 재정과 인사, 병무 등의 중요 업무를 관장하는 대신은 박씨와 석씨 중에서 임명해 적절하게 견제하도록 하고, 실질적인 세력으로 기능할 수 있는 요직에 김씨 후손을 골라 등용했다. 안정적인 왕권을 위해 귀족들의 세력을 적절하게 견제하는 한편 백성들의 평화를 위한 정책을 다양하게 개발 시행했다.



특히 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력을 키웠다. 강력한 군대만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고,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은 훌륭한 군사를 양성해 외부의 적들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중요 지역 경계마다 잘 훈련된 군사들을 배치하고 철저하게 지키게 했다.



또 과거에 신라를 침략해 빼앗아 갔던 백제의 땅을 공격해 되찾아 오기로 하고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해 강한 군사 조직을 운영했다.



미추왕은 강한 왕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내적 조직을 정비하고, 스스로 선봉장이 돼 백제를 향해 진군하는 군사들을 인솔했다. 왕은 “우리는 부모형제가 편안하게 잠을 자고, 행복한 나날을 맞이할 수 있게 하는 신라의 지킴이다”라며 “호시탐탐 우리의 평화를 넘보는 백제군의 가슴을 서늘하게 짓눌러 다시는 우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무찌르자”고 선두에서 외치며 칼을 높이 들었다.



이 전쟁에서 왕은 동서로 뛰어다니며 적의 군마를 무찔러 신라 병사들의 우상이 됐다.

미추왕은 22년의 재위 기간 동안 수시로 변방까지 순찰하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펴 필요한 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실속 있는 정책을 펼쳐 백성들로부터 찬사를 듣는 성군이 되었다.



미추왕이 죽자 백성들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이 슬퍼하며 가장 큰 봉분을 쌓아 대릉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한 달여 동안 상주로 세수도 하지 않으며 흰 옷을 입고 갈아입지 않았다.



14대 유례왕 때 이서국 군사들이 쳐들어와 금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미추왕은 신령의 힘으로 대나무를 죽엽군 군사로 분장시켜 이서국 군사들을 몰아내었다. 이러한 미추왕의 백성들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된 후손들은 사당을 지어 지금까지 제사를 올리고 있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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