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달 전 명절 끝날 산책길/ 인적 뜸한 고향 신작로를 지나다 들었네// 점잖지 못하게 왜 그랬어?/ 오빠란 놈이 동생을 그렇게 하면 어째?/ 아침 공기 잔잔히 물들이는 어떤 중년의 음성// 그 오빤 보이지 않고 하,/ 누렁이 한 마리가 고갤 숙여/ 그 말 고분고분 듣고 있는 곁엔/ 누운 암탉 한 마리/ (아마 옛 버릇을 참지 못하고/ 유순하던 개가 닭을 물었던 모양)// 머릿수건을 쓴/ 그의 아내인 듯한 환한 여인은 또/ 왜 암말도 안하고 아궁이에 장작불만 지피고 있었는지 몰라// 가축 두어 마리, 가금 대여섯/ 키 낮은 채송화 분꽃, 해바라기와 사는 필부인/ 그 사내 부부의 울타리 너머/ 꿈결같이 들은 그날의 음성과// 실수 때문에/ 가책 받은 얼굴로 고갤 숙이던/ 그 착한 개의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다 죄인인 듯 마음이 저려 온다네// 알아듣기나 했으려나 그 말?/ 메아리 소리 곱게 울리던 그날 아침/ 아 참, 내가 진정 못 본 건 또 무얼까?

「그 눈물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걷는사람, 2021)

바삐 살다 보면 고향 가기가 쉽지 않다. 고향을 찾는 명절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여유를 갖고 뿌리를 찾는 날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렇지 않다면 언제 고향 땅을 밟을 것인가. 설날과 추석은 양대 명절이다. 설날은 한 해를 시작하는 첫날, 가족과 함께 새해를 맞는 날이다. 세계적으로 널리 일반화된 명절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석이 좀 더 차별적일 수 있다. 한 해 수확을 마무리하고 자축하는 날이 드문 예는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추석은 오랜 세월 사랑 받으며 개성 있는 명절로 뿌리내려왔다.

추석은 풍요롭고 넉넉한 때다. 그 점도 좋지만 날씨도 그에 못지않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춥지도 덥지도 않다. 등 따시고 배부르며 살기 좋고 놀기 좋은 시절이다. 정겨운 산하를 찾아가서 피붙이들의 얼굴을 보고 그 근황을 살피며 고향까마구들과 추억을 나누다 보면 삶의 고달픔이 날아가고 생활의 활력을 충전할 수 있다. 유년의 추억이 깃든 방에서 밤을 맞으면 알 수 없는 설렘으로 인해 날이 새기도 전에 눈이 떠진다. 괜스레 마음이 들떠서 밖으로 나오면 모든 게 정겹고 반갑다. 길 가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아무 말이나 붙여보고 싶다.

외딴집을 지나가다가 따스한 호기심과 착한 궁금증이 발동한다. 귀는 쫑긋, 눈길은 슬쩍. 점잖지 못하게 왜 그랬어? 울타리 너머로 슬쩍 엿보니 누렁이 한 마리가 머리를 숙이고 서 있고 그 옆에 암탉 한 마리가 누워 있다. 머릿수건을 쓴 여인은 무심히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다. 웃음이 절로 난다. 누렁이 녀석이 배가 고팠나, 암탉이 누렁이를 똥개라고 놀려 먹었나. 웬만하면 누렁이 편을 들어줄 법도 하지만 애써 외면하는 여인이 서운하다. 막 달걀을 나은 암탉을 물다니! 누렁이를 혼내주라고 사주한 정황이 물씬 풍긴다.

개는 잘못을 알고 뉘우치는 기색이 역력하다. 찔끔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닐 터다. 남에게 상처 주고 못할 짓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 비하면 개는 그래도 양반이다. 개보다 못한 사람이 넘친다. 개와 닭 그리고 소와 소통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 채송화와 분꽃 그리고 해바라기와 어울려 사는 삶이 부럽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만물과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마음이 곧 부처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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