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작살나무처럼

발행일 2021-09-12 15:57:1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보랏빛 열매가 탐스럽다. 텃밭에 물을 주려고 보니 “나 여기 있어요~!” 나를 부르는 것 같다. 좀 작살나무다.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작은 것이 언제 꽃을 피웠던가, 열매를 저리도 예쁘게 달고 있으니. 소리 없이 소임을 다하는 그 나무가 새삼 대견하다.

어느 해 가을, 문득 어머니가 몹시 그리웠다. 성묫길에 어머니 무덤가에 좀 작살나무를 몇 그루 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인이 그것을 기억했던가. 좀 작살나무 묘목을 듬뿍 구해서 나눠 주었다. 자주 얼굴 마주하지는 못하지만, 그와의 대화에는 늘 그 나무의 성장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가 만족한 얼굴로 웃을 것 같다.

아련하지만, 9월11일에 대한 기억도 잊을 수 없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먼 미국 땅에서 생활하던 그때 그 불안했던 날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지난 주말은 9·11이 난지 20년이다. 그때 미 국방성 펜타곤 어린이집에 누워있던 언니는 직업군인으로, 동생은 해군사관생도가 돼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자매의 의지, 그 기사를 봤다. 누군가에게는 지나가는 사건일지라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지 못하는 이들도 많으리라. 그때의 나쁜 기억을 잊지 않고 국가에 헌신하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위기가 내면을 성장하게 하는 기회로 여기면 좋지 않으랴 싶다.

30년 넘게 줄곧 근무했던 직장에서 나와 나만의 공간을 마련한 지도 두 달째로 접어든다. 그동안 적응하느라 옆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앞만 보며 조심조심 하루를 보내야 했다. 모두가 생소하게 다가왔으니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생활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 어느 반찬집이 맛 나는지, 어느 식당 스토리가 감동적인지를 새로이 경험한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지만, 그들 나름 전문지식으로 무장해 자부심 그득한 ‘생활의 달인’을 만나는 기쁨 또한 짭짤하다. 순식간에 시간은 흘러간다. 다시 새로이 결심해야겠다. 하루하루 알차게 살아가리라고. 앞으로 20년, 30년도 어쩌면 또 눈감았다 뜨는 사이에 흘러가 버릴 수도 있을 터이니.

날마다 거리 두기를 해야 하는 현실이지만, 마음으로 정했다. 사회 환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등등 이유야 있을 수 있겠지만, 성의만 있다면 가능하지 않으랴 싶어서다. ‘하루 한 가지 좋은 일을 하고, 하루 100자의 글을 쓰고, 하루 천자의 글을 읽으리라. 이 가을에는 날마다 한 사람씩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며 연락해보리라’ 그리하다 보면 뭔가를 이뤘다는 성취감은 언젠가는 덤으로 따라오지 않겠는가.

퇴직하고 새 일을 시작하노라니 분주했던 나날에서 조금은 해방된 것 같다. 나만의 스케줄에 따라 주 5일을 근무하기로 정했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이 좋아한다. 근무 조건에 따라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 아니랴.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며 욕심내지 않고 오래오래 이웃과 더불어 진심으로 귀인을 대하듯 살아가리라. 인생의 가을에는 내릴 것과 올릴 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욕심은 내리고 호기심은 올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어떤 일에도 여유롭게 대할 수 있다고.

맑은 하늘 아래 차를 달리며 라디오를 켠다. 바이올린 연주곡이다. 힐러리 한의 연주였다. 언젠가 그가 한 이야기가 마음을 울렸다. 그는 음악을 시작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곡으로 바흐를 연주했다고. 날마다 최선을 다해 연습함으로써 연주자로서 무대에 설 때면 겸손하게 됐다고, 그리해 그의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예의를 다할 수 있었다고 했다.

서책을 정리하다가 귀가 접힌 책을 발견했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고 접어뒀던 소중한 책이다. 그 자리에 앉아 책장을 넘긴다. 오래된 책에서만 느낄 수 있는 책의 냄새가 향기롭다.

가을에는 적당히 둘러대며 살지 말고 날마다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다. 운세에 등장하는 문구처럼 귀인이 찾아올지도 모르니 내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을 귀하게 대하리라. 그러다 보면 그중에 정말 소중한, 참으로 인생에 귀감이 되는 소중한 보석이 숨어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겸손한 자세로, 다급한 사정에 귀 기울여 들어주고 그것을 해결해주려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순식간에 흘러가 버릴 시간일지라도 후회는 덜하지 않으랴.

거리 두기, 마스크 쓰기, 손 씻기가 생활화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것을 임무로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좋아서 참여하는 일이라 생각을 바꿔 즐거운 놀이라 생각해보면 좋지 않겠는가.

어떤 상황에서도 결실을 준비하는 계절처럼, 우리 인생의 가을에도 고운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기를 소망한다, 좀 작살나무처럼. 아무쪼록 행복하고 즐거운 추석 명절이 되기를 빌어본다.

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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