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과 풀/ 권비영

발행일 2021-09-22 15:39:3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풀잎을 위한 변명~

…소나기에 흠뻑 젖었다. 카페에 들어서자 그녀가 수건을 내밀었다. 무심코 머리를 닦다가 급히 노트북을 닦았다. 그제야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카페 여사장이 웃음을 흘리면서 다가왔다. 카페는 전망이 좋은 신시가지에 있다. 세계적 화가의 모작이 걸려있는 모퉁이에 여사장의 조잡한 취향이 묻어있다. 문화적 식견이 부실하긴 하지만 그래도 가상하다./ 그녀가 커피를 내왔다. 눈두덩에 멍 자국이 시퍼렇다. 멍을 감추기 위한 화장이 우스꽝스럽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여사장이 혀를 끌끌 찼다. 도둑으로 몰려 남편에게 맞았다나. 여사장은 곧 나가야 할 모양이다. 저녁만 먹고 올 거니까 맥주나 한 잔 하자는 뜻을 내비쳤다. 여사장은 소문 난 부잣집 맏며느리다. 남편은 사업차 밖으로 나돌던 터라 카페는 돈 버는 것보다 무료함을 달래는 곳인 셈이다. 여고시절 문학반이었던 여사장은 작가라는 이유로 원룸 하나를 나에게 공짜로 빌려주었다. 유부녀의 은근한 온정이 편할 수만은 없다. 여사장이 나간 후 그녀가 라테 한 잔을 더 가져왔다. 월터 휘트먼을 아느냐고 물었다. 풀잎이 뭐예요, 란 구절이 인상적이었단다. 도둑으로 몰려 매 맞은 얘기를 하며 억울해했다. 그녀의 눈물이 가슴을 후벼 팠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시아버지는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렸고 남편도 그 핏줄을 받아 온 몸이 성한 곳이 없다고 했다. 화풀이하기 위해 자기를 데려온 듯 걸핏하면 팬다고 하소연했다. 그녀는 풀이다.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마음뿐./ 새벽에 그녀 남편이 찾아왔다. 마누라를 내놓으라고 달려들었다. 그녀 흔적을 찾지 못하자 마지못해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풀이 찾아왔다. 헝클어진 머리에 속옷 차림이었다. 아들 문제로 남편과 싸웠단다. 아들 뇌성마비가 그녀 탓이라나. 풀이 울음을 터트렸다. 행복해지려고 애썼지만 불행만 깊어갔다. 전쟁 통에 다리를 다친 그녀 아버지는 바구니 배 뱃사공이었다.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팔려온 신세였지만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단다. 날이 새자 퉁퉁 부은 얼굴로 담요를 감고 방을 나갔다./ 오전 열 시쯤 여사장이 들이닥쳤다. 지난 밤 그녀가 여기에서 잤는지 다그쳤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여사장은 독기어린 눈으로 쳐다보다가 가버렸다./ 여사장은 내게서 관심을 접고 그녀 남편은 풀을 찾아다닐 것이다. 나는 무작정 기차를 탔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풀이 누웠다. 도둑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만 또 도둑은 어디에나 있다. 광풍에 쓰러진 풀은 다시 일어난다. 풀이 자라 산을 온통 다 덮을 때까지 나무는 방심한다. 문득 풀의 안부가 궁금하다.…

인연의 끈이 질기다. 얼굴도 모르는 두 이국인의 베트남 전쟁 참전,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한국 참전군인과 베트남의 퇴역상이군인, 고엽제 후유증을 대물림한 참전군인의 아들과 베트남 퇴역군인의 팔려온 딸, 그 둘의 잘못된 만남, 그 손자의 뇌성마비, 지겹도록 이어지는 불행의 고리가 섬뜩하다. 거기에 끼어든 부유층의 어설픈 문화적 유희와 본능적 욕정이 어색하고 부담스럽다. 남의 재물을 훔치는 자만이 도둑일까. 남의 영혼을 훼손하고 삶을 손상시키는 자도 도둑일 수 있다. 풀은 바람이 불어오면 눕고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일어선다. 풀의 신세가 눈물겹다. 비록 쉽게 눕긴 하지만 풀은 산천을 뒤덮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갖는다. 나는 도둑인가, 풀인가.

오철환(문인)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

많이 본 대구뉴스

많이 본 경북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