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낳는다

발행일 2021-09-28 10:32:1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박운석 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장

한 남자가 책상에 엎드려 있다. 다리를 엇비슷하게 교차하고 앉은 그는 얼굴을 팔에 파묻은 채 잠을 자고 있다. 그의 뒤쪽으로는 어마어마하게 큰 부엉이와 고양이가 노려보고 있고, 거대한 박쥐가 어둠 속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책상에는 ‘이성이 잠든 사이에 괴물을 낳는다’는 글씨가 적혀 있다. 아마도 야행성 동물들이 배치된 걸로 봐서 이성이 잠든 시간인 밤을 표현한 것일 게다.

이 그림은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가 1799년 완성한 연작 판화집 ‘카프리초스(Caprichos)’ 중 43번째 작품이다. ‘변덕쟁이’라는 의미를 지닌 카프리초스에 실린 판화들은 대부분 사회 풍자적인 내용들이다. 주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귀족들과 부패한 성직자들과 함께 마녀와 악마들이 단골로 등장한다.

네이버에서 소개하고 있는 미술백과에 따르면 1790년대 말, 스페인의 군주는 잇따른 전쟁으로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교회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했다. 당시 왕실 화가였던 고야가 교회의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판화를 제작함으로써 군주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기여했다고 보는 미술사학자도 있다. 하지만 미신과 어리석은 신앙 등을 내용으로 한 이 판화집이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카를로스 4세 정권은 무능하면서도 부패했고, 그로인한 스페인의 정치와 사회적 혼란을 꿈, 주술, 광기로 포장해 우회적으로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200년이 훨씬 지난 고야의 작품을 이제 와서 소환한 것은 한국사회가 이성을 되찾아야 할 시기여서다. 지금 한국사회는 어떤가? 이성은 잠들어있고 그 사이 온갖 괴물들이 나타나 곳곳에서 활개치고 있지 않은가.

한국 철학계의 대표적 학자 중 한 명인 이진우(65·전 계명대 총장) 포항공과대 인문사회학부 교수를 통해 한국을 들여다보자. 그는 지난달 펴낸 책 ‘불공정사회’에서 “우리 사회의 공정은 허구”라고 비판했다. 공정을 간절하게 외치는 사회야말로 불공정사회이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이 교수는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합법적인 것을 곧 정당한 것처럼 여기는 행태야말로 대표적 불공정 사례”라고 말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여당이 180석이라는 의석수를 앞세워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의원숫자로 밀어붙이는 것을 들었다. 합의를 배제한 다수의 지배는 합법적일지라도 결코 정당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경기 성남 분당구 대장동 개발사업의 과정도 마찬가지다. 자본금 3억5천만 원으로 4천억 원의 배당을 받은 것, 개발사업을 주도한 화천대유에서 대리 직급으로 근무하다 50억 원의 퇴직금을 받은 것, 회사 보유분 아파트를 분양 받아 수억 원의 시세차익을 얻은 것도 개인의 능력으로 봐줄까. 법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이를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은 경쟁의 과정이 공정하냐의 문제이다. 이 교수는 경쟁의 과정이 공정하다면 결과로 드러난 불평등도 정당하게 여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과정이 불공정하다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권력수단으로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능력을 이용한다고 했다.

신은 인간을 파멸시켜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먼저 이성을 빼앗아간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성이 잠자고 있다. 신에게 이미 이성을 빼앗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대장동 개발사업 같은 괴물을 낳고 있다.

그런대도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니게스처럼 이성이 살아있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고대 그리스 시대 당시엔 서민들의 주식은 소금 간을 한 콩 요리였다. 이런 보잘 것 없는 빈약한 식사를 하는 것을 ‘소금을 핥는다’고 표현했다. 한 귀족이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의 풍성한 식사자리를 마련해두고 디오니게스를 초대하자 그는 “아테네에서 소금을 핥는 게 훨씬 낫다”며 귀족과의 식사를 거부했다. 식사조차 겨우 이어가는 서민들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진수성찬을 즐기는 귀족들의 사치를 질타한 것이다.

현실의 한국사회를 본다면 디오니게스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고야는 또 어떤 판화작품을 남길까. 카프리초스처럼 어둠 속에서 박쥐가 덤벼들고 부엉이가 노려보고 있지는 않을까. 혹시 이성은 잠들어있고 이미 괴물들이 활개치고 있는 모습을 그리지는 않을까.

박운석(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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