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김강호

발행일 2021-10-05 13:59:5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너를 가만 들여다보면 산 있고 계곡 있고/숨 가쁘게 내달리던 원시의 소리 있고/

긴 어둠 강을 건너던 부르튼 뗏목 있다//험한 길 걷는 동안 못 박히고 뒤틀렸지만/

속울음을 삼키며 순종해온 너를 향해/수많은 길이 다투어 걸어오는 걸 보았다/새벽녘 경쾌하게 내딛는 너에게서/잠이 든 빌딩 숲을 깨우는 실로폰 소리/절망도 가볍게 넘을 날개 돋는 소리가 난다

「나래시조」 (2020, 봄호)

김강호 시인은 1999년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참, 좋은 대통령’, ‘팽목항 편지’, ‘귀가 부끄러운 날’, 현대시조 100인선 ‘군함도’ 등이 있다.

‘발’은 발을 자세히 살피면서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 몸의 소중한 부분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다. 발은 서고 걷고 달리게 한다. 사람이나 동물의 체중을 받치고 땅을 디디는 구실을 하는 다리 맨 끝의 편평한 부분이라는 기본적 의미로만 발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의 화자는 너를 가만 들여다보면 산이 있고 계곡이 있고 숨 가쁘게 내달리던 원시의 소리가 있고 긴 어둠 강을 건너던 부르튼 뗏목이 있다, 라고 여러 정황을 상기시킨다. 발의 수행일지처럼 말이다. 실로 험한 길 걷는 동안 못 박히고 뒤틀렸지만 속울음을 삼키며 순종해온 너를 향해 다행하게도 수많은 길이 다퉈 걸어오는 것을 화자는 똑똑히 보고 있다. 그래서 새벽녘 경쾌하게 내딛는 너에게서 잠이 든 빌딩 숲을 깨우는 실로폰 소리를 듣게 되고 마침내 절망도 가볍게 넘을 날개 돋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는다. ‘발’은 이렇듯 삶에 대한 무한긍정을 바탕으로 올곧게 주어진 길을 견인하고자 하는 굳건한 의지를 보인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을 보자. ‘어머니의 눈’이다. 요즈음은 요양원이 대세다. 입원하게 되면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따금 방문할 때마다 서글픔을 금하지 못한다. 아무리 생로병사라고 하지만 연로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다가 세상을 하직해야 하는 인생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시의 화자는 요양원 유리창에 눈망울이 붙어 있다, 라고 간절하게 노래한다. 얼마나 가족이 보고 싶으면 그럴까? 흐릿한 동공 속에는 눈꽃이 흩날리고 그 눈꽃을 맞으면서 올 아들이 그리운 것이다. 아들의 얼굴을, 목소리를 듣고 싶은 어머니는 유리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러면서 세상을 다 담아도 아들보다 작은가 보다, 라고 읊조리면서 유리문에 달라붙어 망원경이 돼버린 그 눈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서럽도록 따뜻하다, 라는 마지막 구절이 가슴을 친다. 그 서러움을 다독이며 따뜻함을 간직한 어머니는 곧 아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늘 함께 하지 못하고 곧 작별을 해야 한다. 인생이 다 그런 것이다.

‘풍경’이라는 단시조에서 그는 동백꽃 가득한 산에 달빛 쌓이던 밤 오랫동안 견뎌왔던 그리움에도 피가 돌아 하늘에 파문을 내며 울고 있는 여인, 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섬세한 감각이 돋보인다. 동백꽃, 산, 달빛, 밤, 그리움, 피, 하늘, 파문, 여인이라는 이미지가 묘하게 결합돼 새로운 미적 정황을 직조한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늘 감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좋은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또한 체험과 상상력의 융합을 통해 언어로 소우주를 창조하는 일은 부단한 절차탁마 없이 불가능한 일임을 절감한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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