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의 산책~

… 여정이 하천변을 걷고 있었다. 108번째 산책이다. 그 흔들림이 자궁 속의 나를 깨웠다. 첫 산책은 신경세포가 생겨난 임신 113일째였다. 지구의 태양시가 아닌 나의 기준으론 109일째였다. 가을이 가득했다./ 산골마을은 국책사업으로 순환선 공사가 진행 중이다. 여정과 만철은 터널식 방음벽을 설치해달라는 주장을 했다.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자 만철은 환경지킴이로 변신하여 보상범위를 확대해달라는 쪽으로 돌아섰다. 만철이 이모와 함께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시위를 주동하면서 여정과는 소원하게 되었다./ 두 산을 잇는 순환선 건설을 위한 콘크리트 기둥이 들어섰다. 만철은 바쁘게 돌아다녔고 여정은 산과 하천변을 걸었다. 주변사람들이 여정을 떠나갔다. 여정은 찰흙인형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물동이를 진 여인’은 그 결실이다. 먼 윤회의 기억이 떠올랐다. 열대의 냇가, 물동이, 바오밥나무. 나와 여정은 운명의 심연 어딘가에 닿아있었다./ 익숙한 곳이 낯설어 혼란스럽다. 텃밭 대신 뼈대만 남은 집이 불편하다. 만철과 이모는 점점 더 목소리를 높였다. 만철이 대책위원장을 맡자 여정은 잠자리를 작업실로 옮기고 말도 섞지 않았다./ 공방 진열장에 여정의 찰흙인형이 전시되고 있었다. 나름 반응이 좋다. 블로그에 ‘물동이를 진 여인’의 주문이 들어왔다. 그 여인 옆에 아이도 함께 만들어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여인과 아이를 만들어 어울리는 것끼리 짝을 지어 주었다. 고객과 친구에게 한 쌍씩 보냈다. 친구는 교통사고로 저 세상으로 갔지만 남편이 납골당에 갖다놓았다고 했다./ 근래 만철과 말도 하지 않고 지냈지만 한때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다. 여정은 오랜만에 좋은 소식을 함께 하고자 사무실로 만철을 찾아갔다. 막상 만철을 마주하자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았다. 급히 만철에게서 빠져나온 여정은 자존감이 상해 눈물을 흘렸다. 여정은 작업에 몰두했다. 찰흙 반죽을 하고 있는데 만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여정은 작업대에 엎드려 잠든 척 했다.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불을 덮어주고 갔다. 따뜻한 느낌이 왔다./ 찰흙인형을 부치려 캐리어를 끌고 우체국으로 갈 참이었다. 이모가 대문을 두드렸다. 술에 취해 늦게 들어와 자고 있던 만철이 얼굴을 찌푸리며 대문을 열어주었다. 만철이 대책위에 발을 빼려했던지 이모가 흥분한 채 여정 때문이라는 듯 시비를 걸었다. 셋이 가파른 길에서 몸싸움을 하다가 여정이 넘어졌다. 탯줄이 목에 감겨 나는 두 다리를 내질렀다. 구급차가 출동했다./ 삼주 후 따스한 봄날, 만철은 아기를 안고 여정과 하천변을 걸었다.…

109번째 산책이 제목이다. 주인공은 태아다. 아프리카 여인의 물 깃던 아련한 추억은 잊혀져가고 엄마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때다. 엄마는 전생의 인연을 잡아낸 듯 찰흙으로 ‘물동이를 진 여인’을 만든다. 진솔한 마음과 영혼이 깃든 정성으로 집중한 터라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있을 법하다. 보는 사람의 평가가 좋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주문이 들어오고 대박 조짐마저 보인다. 한편, 도로공사로 마을이 어수선하다. 공동체가 파괴되고 보상금이 개입되면서 갈등이 증폭된다. 평범한 사람이 환경운동가로 변신해 주먹을 불끈 쥔다. 부부도 마음이 멀어지고 등을 돌린다. 전생의 영감이 스며든 찰흙인형에서 화해의 실마리를 찾고 태아의 탄생으로 갈등이 해소되는 카타르시스 구도가 인상적이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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