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을 들여다본다. 옴폭 패인 그곳엔 나를 세상과 이어주던 탯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 아직 뱃속의 양수에 잠겨 있을 적, 어머니는 한 줄의 제대정맥과 두 줄의 제대동맥을 내려 주었다. 나는 그 세 줄을 통해 신선한 산소와 풍부한 영양분을 공급받고 노폐물을 뱉어내면서 열 달 동안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내 태초의 집인 자궁은 어머니의 바다인 셈이었다.

바다를 본다. 이곳은 고래가 가끔 출몰한다는 포항 앞바다. 오래전 탯줄이 끊어진 날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던 나와는 달리 탯줄이 끊어진 다음에도 바다를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고래의 배꼽을 떠올려 본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사람이 살지 않던 시절엔 고래도 육지에 살았다고 한다. 가슴지느러미에 남아 있는 사람의 손과 비슷한 손가락 뼈 다섯 개의 흔적이 그 증거라고 한다. 다시 바다를 본다. 한참을 기다려도 고래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경해(鯨海)라는 새벽 바다가 쓸쓸하다.

옛사람들은 자궁의 숨결을 태동이라 부르며 새 생명 탄생의 기미를 태동으로 느꼈다는데, 해 뜰 무렵이지만 오늘따라 운무가 자욱하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 모포로 향한다.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유배지였던 장기면 모포까지 가는 길에 뒤늦게 해가 뜬다. 문득 고래야말로 먼 바다에 영원히 유배된 처지란 생각이 든다. 누가 이 앞바다에 엉뚱한 금줄이라도 쳐놓은 걸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아이가 태어나면 그 집안 남자들이 깨끗한 볏짚을 왼새끼로 꼬아 삼칠일 동안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새끼줄을 대문 앞에 걸어두었는데, 누군가 보이지 않는 줄로 바다와 뭍 사이에 경계선이라도 쳐둔 걸까?

꼬르륵, 배꼽시계가 시장기를 알려왔지만, 배고픔의 절박함도 호기심을 앞지를 수는 없다. 오늘은 큰 줄다리기가 있는 날. 본격적인 줄다리기를 지켜보기 전에 골매기당 구경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나를 인도하는 내비에는 한반도의 배꼽쯤인 호미곶에서 2촌 4푼 정도 아래쪽에 골매기당이 표시되어 있다. 그곳은 말하자면 들숨과 날숨의 기준점이 되는 단전과 같은 곳이다. 하지만 동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던 차는 샛길인 모포길과 만나는 지점에서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마을 뒤편의 뇌성산 자락을 잡고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다행히 그리 가파르지도 않은 길이지만, 아쉽게도 정사각형 돌담에 둘러싸인 작은 당집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다. 문틈으로 바라본 당집 안쪽엔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골맥이할배와 할매도 보이지 않는다. 벌써 장정들이 어깨에 두 분을 짊어지고 큰 마당으로 모셔다놓은 게 분명했다. 여태 허탕을 쳤지만, 부정한 것으로부터 고을을 보호하고 계신 골맥이신들이 이방인인 내 방문을 내켜 할 리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터벅터벅 내려오는데 배꼽에서 또 다시 꼬르륵 소리가 들려온다. 뜬금없이 내 탯줄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옛사람들은 태를 태우고 남은 재를 단지나 옹기에 담아 숲 그늘에 묻어두었다는데, 그렇다면 이 지역 사람들이 평소 골매기당에 잘 모셔둔다는 모포줄은 또 다른 탯줄이 아닐까라는 상상이 나래가 펼쳐진다. 전설 속의 여와와 복희씨처럼 서로의 몸을 배배 꼰 모포줄, 다시 말해 골맥이할배와 할매가 사랑하는 모습을 내 멋대로 떠올리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실없이 웃다 보니, 머리칼도 춤을 추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 속을 뒤진다. 하지만 고무줄이 없다. 오래전 엄마는 곱게 빗질한 내 머리채를 세 가닥으로 갈래짓고 촘촘히 땋은 다음, 고무줄로 매듭으로 묶어주었다. 그것이 마치 우리 사이를 이어주던 탯줄인 것처럼, 한 줄의 제대정맥과 두 줄의 제대동맥인 것처럼, 아침마다 당신에게서 받은 내 생명줄을 정성껏 매만져주었다. 어쩌면 이곳 사람들도 때가 되면 아침마당에 모여 볏짚에 칡넝쿨을 섞어가며 굵고 긴 줄을 꼬다 말고 자신들이 엮고 있는 모포줄이야말로 뭍과 바다를 연결해주는 생명줄이란 생각을 한 번쯤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뭍에서 살고 있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포유류인 고래가 유독 많이 출몰했다는 바다가 코앞에 보이는 포항 바닷가 마을에 탯줄 같은 모포줄을 모셔둔 골매기당이 여태도 남아 있는 것도 우연만은 아닐 성싶다.

얼마나 지났을까, 당집을 뒤로하고 내려와 해안선을 따라난 모포길과 만나는 곳에서 낚시마트에 들렀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주인에게 모포줄다리기가 펼쳐질 장소를 묻자, 배꼽마당에서 하지 않겠냐는 난해한 답변만을 들려준다. 배꼽마당이라니, 옛사람들은 동네 한가운데 큰 마당을 그리도 불렀다고 하지만, 모포줄다리기에 참가하는 마을이 여럿인 만큼 헷갈리는 대답이 아닐 수 없다.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장소를 물었지만 무뚝뚝한 주인은 자신도 잘 모른다는 한 마디로 사람을 밀쳐낸다. 답답하다. 새해 첫날이나 음력 팔월 십육일에 있다는 모포줄다리기에 대한 정보만 믿고 무작정 밤길을 달려온 즉흥적인 내 자신이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하다. 어쩌면 사라진 전통축제일 수 있는데, 어쩌면 다른 날을 잡아 치를 수도 있는데, 나는 어쩌자고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시동부터 걸었을까. 걷다 보니 해파랑길 표지판이 나온다. 걷다 보니 이 코로나 시국에 구룡포와 호미곶의 동쪽 마을 사람들과 장기에서 감포까지의 서쪽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내 자신의 어리석음이 우습기까지 하다.

식당도 이제야 문을 연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기웃대는 나를 알아보고 손짓을 한다. 쪽진 머리에는 비녀까지 꽂고 있다. 문득 돌아가신 내 할머니가 그립다. 내 할머니도 만년까지 숱이 적어진 머리채를 똘똘 말아 올리고 비녀를 꽂으셨다. 자꾸만 쓸쓸해지려는 기분에 인터넷 검색을 해본다. 모포줄엔 암수가 있다. 암줄의 머리맡 쪽엔 커다란 구멍이 있는데, 그곳에 수줄을 넣어 암수매듭을 짓는다고 한다. 남녀의 교합을 상징하는 그런 행위를 ‘비녀를 꽂는다’라고 부른다는 대목에서 고개를 들어 식당 안을 둘러봤다. 비녀를 하고 있는 할머니가 골맥이할매의 현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시 뒤 할머니가 내놓은 마른 반찬과 국은 눈물처럼 짰다. 하지만 난 어릴 적 입맛으로 배불리 먹었다.

그새 태양의 고도가 높아져 정수리가 뜨겁지만, 방파제를 따라 걷는다. 곳곳에서 조사들이 바다로 드리운 낚싯대가 보인다.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수면을 멍하니 바라본다. 낚싯줄이 사라진 그곳엔 작은 동심원이 퍼지고 있다. 그곳이 이제는 볼 수 없는 귀신고래의 배꼽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한 조사가 낚싯대를 빠르게 감아올린다. 줄이 짧아질수록 그 끝에 매달린 조그마한 물고기의 퍼덕임도 거세진다. 그와 동시에 내 배꼽 주변으로 찌르르한 느낌이 퍼진다. 어쩐지 세상 모든 배꼽이 슬퍼진다. 눈물이 흐른다. 짭조름하니 간이 딱 맞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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