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고령 노강서원

발행일 2021-10-17 20:00:00 댓글 1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 위치

우암 송시열 배향한 서원…붕당정치 이해 관계 얽혀

고문서 19점, 문화재 지정돼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 위치한 노강서원은 동쪽의 낙동강을 기준으로 대구 달성군 논공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낙동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강 주변에는 수많은 농지들이 들어서 농업생산을 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남쪽으로는 약 300m 떨어진 곳에 민가가 들어서 있고 남서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는 공장들이 들어서 산업단지가 조성돼 있다.

대가야읍을 중심으로 우뚝 서 있는 노강서원이 다른 서원과 달리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로 배치적인 부문에 있다.

노강서원은 대문채에서부터 지대가 높아지는 경사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이 발생한다.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사당이다.

서원이 경사지에 건축되는 경우 보다 높은 후면에 사당을 두는 전학후묘 구조에 따라 오늘날 남아있는 서원의 대부분이 이 구조로 돼 있다.

하지만 노강서원에는 사당이 없고 모두 3채의 건물(8칸의 강당, 3칸의 대문채, 2칸의 화장실)만이 서원 내 배치돼 있다.

특히 노강서원의 강당은 사당 대신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제사와 강학의 공간을 겸하고 있다.

이곳은 대문채를 지나 축대 계단을 오르면 위치해 있으며, 실 구성은 중앙 마루를 기준으로 양쪽에는 협실이 있고 마루 배면에는 제사를 지내고 원내의 회합과 학문토론의 장으로 쓰인 방이 있다.

예를 지키면서도 학문적 소양을 더 중히 여긴 지역 유림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서원의 의미와 우암 송시열과 관련된 정치적 시대 상황을 깨우친다면 노강서원의 설립 배경과 그 문학적 정신에 대해 비로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송시열이 머물다 간 노강서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노강서원을 말하다

‘서원’은 조선 시대에 유교의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이다.

낙동강이 내려 보이는 위치에 있는 노강서원은 송시열 등 조선시대 노론 핵심인물들을 제향한 서당이다.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는 숙종 5년(1679년) 송시열이 거제도 유배 중 잠시 거처 간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에 숙종 38년(1712년) 지역 신출 노론이 주도하고 중앙 노론 세력과의 협조로 영남의 대읍인 성주목(조선시대 송곡리는 성주군에 속해 있다가 1906년 고령군에 편입)에 송시열을 기리기 위한 노강서원이 창건됐다.

이 당시 송시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위패가 모셔졌으며, 이후 권상하, 한원진, 윤봉구, 송환기라는 송시열의 제자들이 추가 배향됐다.

또 교육 기능과 교화 기능을 양 축으로 지역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노강서원은 숙종 이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가 고종 20년에 다시 재건됐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절반 이상이 파괴됐다가 '성주십가문중'에 의해 다시 복원·중수됐다.

◆송시열을 논하다

노강서원에서는 송시열과 그의 문인들을 제향하고 있다.

특히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시열의 학문과 덕행을 추고하기 위해 창건됐으며,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송시열과 함께 제향되고 있는 문인들로는 권상하와 한원진, 윤봉구, 송환기가 있다.

송시열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에서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해 당쟁의 요인이 되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사돈인 ‘권시’와도 틈이 생겼다.

또 이유태와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평생의 동반자였던 송준길마저 뜻을 달리하게 됐다.

그의 제자 중 가장 촉망받던 윤증과도 문제가 발생해 노소분당(노론과 소론)을 야기시켰다고 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하에는 수시로 공부한 문인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되나, 조광조와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발전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했으며, 이후 조선 후기에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 체계로 발전하는 밑거름을 완성했다.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을 남겼다.

◆노론과 소론, 붕당을 이해하다

조선 중기 정치적 이해관계를 두고 사림파의 여러 세력들이 갈라져 붕당이 발생하게 된다.

사림파는 임진왜란 후 득세해 권력을 잡으며 성리학적 명분론을 신봉한 계파이다.

사림파 유생들이 선조 이후 정계에 대거 진출하며 정권을 차지하게 됐다.

구 세력인 훈구파(조선개국공신)를 몰아내기 위해 뭉쳤던 사림파는 인사권을 행사하는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갈등을 겪은 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며 대립을 이어갔다.

동인 세력은 다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뉘게 됐다.

서인 세력 또한 강경파는 노론으로, 온건파는 소론으로 갈라졌다.

이 노론의 영수가 바로 송시열이다.

노론은 조선 왕조 시대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정권을 잡은 당파로, 송시열을 옹호하며 영조를 지지한 세력이다.

소론은 윤증(송시열의 문인)을 옹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영남지역은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서인세력이 폭넓게 확산됐으며, 노론 정권의 대 영남정책의 일환인 자파 서원 건립에 따른 향촌 분열책과 지역 신출 노론세력과의 이해관계가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서인계(노론계) 인물을 제향하는 서원·사우가 본격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 당시 고조된 송시열의 추숭 분위기와 갑술환국 후 집권한 중앙 노론의 정치적 지원 등의 흐름에 힘입어 영남의 거점 중 하나인 성주에 노론계 서원(노강서원)이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이 노강서원을 매개로 신출 노론세력들은 향권 주도권과 더불어 노론의 당론적 정치 역할을 수행하고 기호학파와의 교류에 나서게 됐다.

◆노강서원의 고문서

노강서원에서 발췌된 문헌 자료로는 시문과 원임안, 원생안, 방명록이 있다.

이 문헌들은 필사본으로 된 유일본일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영남지역 노론계 서원의 역사, 인적구성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20세기 이후 작성된 원임안 2책, 계안 2책, 노강서당 낙성운 1책을 제외한 19점이 현재 경북도 문화재자료로 문화재자료 지정대상으로 선정돼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다.

시문에는 노강사창수첩(2책)과 석문필적(1책), 노강서당낙성운(1책)이 있으며 원임안에는 전임안(1712~1868년·3책)과 노강임안(1책), 전임안(1952년·1책)이 있다.

원생안은 원록(4책)과 서재노유안(1책), 노강계안(1책), 신축계안(1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방명록은 심원록(8책)으로 불린다.

노강사창수첩은 노강시첩이라고도 불리며, 노강서원을 심방한 관찰사 정익하를 비롯한 인근 고을의 관원들과 지역의 노론유림이 수창한 시를 엮은 것이다.

특히 영남지역의 노론계열 군수와 현감, 그리고 인근 지역의 선비들이 함께 우암의 영정에 참배한 뱃놀이를 하면서 즉흥적으로 율시를 짓고 화답시를 하는 등 이를 모아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석물필적은 우암의 문인인 윤봉구의 동생 윤봉오가 두 번째로 노강서원을 방문해 남긴 필적이다.

노강서당낙성운은 노강서원의 낙성을 기념하며 이곳에 모인 성주와 고령 일대의 문인들이 읊은 시를 모은 것이다.

이밖에 원임은 조선시대 서원을 운영하고 대표하는 직책으로, 노강서원의 서원 운영을 담당했던 원임의 구성을 알려주는 자료가 바로 전임안이다.

노강임안은 1901~1958년 작성된 노강서원 128명의 임원 명부이다.

이들의 본관을 나열하면 파평윤씨 20명, 순천박씨 16명, 경산이씨 11명, 성산이씨·수성나씨 10명, 벽진이씨 7명, 성산도씨·성주이씨 각 5명, 성산여씨 6명, 고성이씨·안동권씨 각 4명, 밀양박씨·순천김씨·청주정씨 각 3명, 김해김씨·단양우씨·성주도씨 각 2명, 담양전씨·서산정씨·선산김씨·창녕조씨·창원황씨 각 1명, 미상 10명 순이다.

원생안은 뜻 그대로 원생들의 명부이며, 시대적 배경에 맞춰 각 원생들이 수록돼 있는 게 특징이다.

심원록은 서원방문객들의 방명록으로, 그 서원의 대내외 인적 관계와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영조 16년(1740)부터 철종 3년(1852)까지 113년간 서원을 방문한 인원만 2천732명에 이른다.

◆노강서원의 보존·관리, 활용

현재 노강서원은 당무를 총괄 관장하는 당장을 비롯해 당장을 보좌하고 본 서당의 운영에 협조하며 당장 유고시 당장의 직무를 대행하는 도청 3명, 실질적인 노강서원 대표자로 각종문서와 도서보관, 연락사무, 향사 및 회의준비, 자금관리 등을 담당하는 내감 1명, 당무를 감사하는 감사 2명 등으로 조직돼 운영되고 있다.

이들 임원들은 오래 전 노강서원의 원임 문중의 후손들로, 현재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한 노강서원의 발전 계획은 고령지역의 특색을 살린 문화재 활용에 있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와 유적들을 대가야문화와 함께 개발해 나간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다.

많은 관광객의 유치와 관심으로 문화유산의 대표적 도시로의 성장과 더불어 문화재 보존·활용적인 측면에서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전통문화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교육 및 체험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단순 건축물이 아닌 당시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스며있는 유교문화의 전승공간으로 접근한다면 서원의 가치를 더욱 드높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노강서원의 원임(내감)이기도 한 나종근(고령군 다산면장)씨는 “대가야박물관에 보존 중인 고문헌들이 경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다행이기는 하나, 무엇보다 서원 자체가 경북도 문화재로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며 “현 고문헌들을 국가 보물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서원 또한 같이 등재시킬 계획이다. 현재 서원 주변 인프라가 많이 개선된 까닭에 고령의 랜드마크로 손색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동현 기자 leed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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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on*****2021-10-17 22:29:55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 @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啓聖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啓聖王夫人)이십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 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http://blog.daum.net/macmaca/3131 @동아시아는 수천년 유교사회입니다. 공자님 이전의 始原유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 이전의 구약성서 시대에 해당됩니다. 하느님(天).神明,조상신 숭배가 유교의 큰 뿌리입니다. 유교는 국교로, 주변부 사상으로는 도가나, 음양가, 묵가사상등이 형성되었고, 법가사상은 이와는 다른 현실적인 사상이며,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진나라때 강성하고, 유교나 도교와 달리, 한나라때 율령이 반포되어 이후 동아시아에 유교와 별도의 성격으로 국가통치에 활용됨). ​ @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http://blog.daum.net/macmaca/2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