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에 이르니 모든 것이 부질없다/ 숨 가쁘게 달려온 길들이 흐릿하게 지워지고/ 유혹의 붉은 열매도 초점 너머로 물러선다/ 아직 해는 중천에 떠있는데/ 가을 바람소리 중천을 흔든다/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니/ 앞 들 굽은 강이 산그늘 싣고 가고/ 뒤란 감나무에는 새들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빈 들판에 서서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서 남루의 짐을 내려놓을까/ 눈을 드니 문득 떨어지는 낙엽 하나가/ 지평의 서쪽 끝을 흔들고 있다

「가혹한 향기」 (문예바다, 2021)

인생은 유한하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돼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수명은 몇 살일까. 백 살이 넘도록 건강하게 사는 경우도 있지만 모두가 납득할만한 수명은 딱 부러지게 말하기 힘들다. 확실한 것은 정해진 수명은 없다는 것이다.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할 때 일정한 수명을 부여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른 뜻이 있을까, 아니면 단순한 실수였을까. 한낱 피조물이 조물주의 깊은 뜻을 감히 헤아릴 순 없다. 그렇다고 그 궁금증마저 숨기고 싶진 않다.

인생의 한 갑자는 60년이다. 그래선지 정년이 대부분 60세다. 그런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60년을 어떤 변곡점으로 본 것 같다. 생체적 내구연한에 관계없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나이가 60세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실제로 환갑이 되면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노화가 급속히 진행된다. 망각 속도가 빠른 탓에 당황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인생은 60부터라고 자위해보지만 그것은 오히려 인생은 60까지라는 자백일 뿐이다.

공자는 인생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한다. 평범한 보통사람이야 감히 공자에 미칠 바 못되지만 그래도 오십 세 정도 되면 천명을 짐작할 수준에 이른다고 유추할 수 있다. 천명은 ‘하늘의 뜻’이란 말이겠지만 어쩌면 ‘하늘이 준 수명’을 일컫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천명의 함의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간다는 의미로 새길 수 있다. 그런 뜻에서 보면 대충 그런가 싶기도 하다.

지천명이 되면 지난 세월이 덧없고 집착했던 것들이 부질없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인생무상을 설파한 앞서간 성인의 성찰을 젊은 시절에 여러 번 대하지만 귓등으로 흘려버린다. ‘공수래공수거’나 ‘삶은 한 조각 뜬구름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 스러짐이다’라는 명구 등 널리 회자되는 불가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별개다. 결국 연륜이 다 차야 그 연륜의 경지를 이해하는 법이다.

천명을 알만한 나이가 지났다. 부귀와 권세도 눈 밖에 나고 사랑과 열정도 하릴없이 식어간다. 가을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와 옷깃을 스치면 섬뜩한 기운이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쓸쓸한 마음을 마냥 재촉한다. 흘러가는 강물에도 괜스레 허망한 세월을 낚아낸다. 감나무 가지에 새들마저 없는 휑한 날이면 공연히 진한 외로움이 온몸으로 축축하게 젖어든다. 나뭇잎 하나가 떨어져 땅바닥에 뒹굴라치면 울적한 심사를 가눌 길 없어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려야 할 터이다.

추수가 끝난 텅 빈 들판은 허망한 지천명의 고독만큼이나 황량하다. 텅 빈 들판을 바라보며 갈 길을 찾는다. 지금 어디로 가야 하나. 서녘 하늘에 황혼이 붉게 물들면 허무한 삶이 더욱 무상하다. 시끌벅적한 시장바닥에 앉아 낙엽을 태우며 막걸리라도 한 사발 마셔야 할 것 같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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