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를 툭 치고 가네/박환규

발행일 2021-10-19 09:51:0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서둘러 봄 떠난 자리 짙어지는 초록물에/살짜기 손이라도 담그고 싶은 저녁/유월은 휘어지도록 가라앉아 길을 낸다//그 길의 허릴 안고 여름 달이 떠 있다/너무 가까워서 무거웠던 내리사랑도/다정도 참 편안하고 홀가분할 때가 있다//이제까지 흘러 보낸 작은 일상들이/버리지 못한 헌 옷 같이 새삼 그리운 날/때마침 헐거웠던 이웃 어깨를 툭 치고 가네

「시조정신」(2021, 9호)

박환규 시인은 2019년 울산에서 발간되고 있는 시조전문지 ‘시조정신’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어깨를 툭 치고 가네’는 시가 우리의 어깨를 살갑게 툭 치고 가는 느낌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한껏 정겨움 속에 읽어 내려가게 한다. 시가 어디 먼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 가운데 있음을 느끼게 한다. 다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뿐이지 시는 항시 우리 곁에서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서둘러 봄 떠난 자리 짙어지는 초록물에 살짝 손이라도 담그고 싶은 저녁은 참으로 평화롭다. 이러한 평온은 삶의 질을 높여준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때 유월은 휘어지도록 가라앉아 길을 낸다, 라고 화자는 말한다. 휘어지는, 이라는 이미지의 구현으로 잘 휘어지는 일이 인생사가 아닌가 하고 되짚어보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의 허리를 안고 여름 달이 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너무 가까워서 무거웠던 내리사랑도, 다정도 참 편안하고 홀가분할 때가 있음을 토로한다. 내리사랑이나 다정이 마음을 홀가분하게 한다는 의미는 그만큼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방증이다. 하여 이제까지 흘러 보낸 작은 일상들이 버리지 못한 헌 옷 같이 새삼 그리운 날이 있어 때마침 헐거웠던 이웃이 어느 날 어깨를 툭 치고 간다. 일찍이 이호우가 ‘살구꽃 핀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라고 노래한 것을 계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살구꽃이 피지 않았으면 그러한 흥이나 신명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봄날이요, 꽃이 피었으니 마음속에 즐거움으로 가득 차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도 역시 툭 쳤을 것이다. ‘어깨를 툭 치고 가네’에서는 일상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그러한 움직임이 저절로 일어난 것이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이 일상이고 일상의 평온이다. 소소한 것의 귀함을 ‘어깨를 툭 치고 가네’는 잘 그리고 있다. 문학평론가 방민호는 하나의 서사적인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음과 동시에 이 이야기를 무거움에 빠뜨리지 않고 늦은 봄 초여름의 애상적인 정취로 멋스럽게 갈무리한 작품이라면서 단순히 자연의 순환에서 오는 감정을 넘어 계절을 타고 오르는 사람살이의 살가움에 대한 화자의 알뜰한 생각과 감정을 담고 있어 새로운 개척의 묘미를 갖추고 있다고 평가한다. 텍스트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다.

그의 다른 시조 ‘텃밭’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맘 한켠 소망 한켠 두둑한 나의 텃밭에 상추도 치커리도, 이랑이랑 토마토도 자라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내가 웃고 서 있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오늘 저녁 식탁을 생각하니 기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는 농부의 마음으로 자식농사 지으면서 비바람 막아서며 푸르른 생명 앞에 오늘은 또 다른 나를 보고 있다고 진술한다. 그렇기에 잡초까지도 마음 깊이 품는다.

이처럼 박환규 시인은 일상을 사랑하며, 끝없이 평온을 희구한다. 그러한 결 고운 마음이 작품 곳곳에 잔잔한 물결처럼 번지고 있다. 그것으로 족한 일이다. 정격시조의 엄격함 속에 인간적 성숙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능력을 갖춘 시인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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