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싹트는 길~

… 봄 산행에 나섰다. 왼손을 서연의 배낭에 올리고 오른손으로 흰지팡이를 잡았다. 배낭의 움직임으로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고 지팡이의 터치로 바닥상태와 장애물을 분별했다. 산길로 접어들자 봄기운이 물씬했다. 서른여덟에 흰지팡이를 짚었다. 서연의 걸음걸이는 궁합이 잘 맞았다. 눈 뜨고 걷는 것 같다. 삼년 전, 이 근처 무덤가에서 은경과 김밥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은경은 내가 망막 변성으로 시력을 잃자 떠나갔다. 은경의 친구를 통해 가입한 상해보험에서 시각장애 보상금이 많이 나왔다. 은경이 남긴 유산이 됐다. 새 소리를 들으며 서연과 하드를 먹었다. 전망대에 도착했다. 난간에 손을 올린 채 내려다보던 은경이 생각났다. 나는 방향을 잡고 기억을 더듬었다. 서연에게 봄이 보이는지 물어봤다. 연초록 새순이 돋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온몸으로 봄이 느껴졌다. 서연에게 술을 권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의 시선이 뺨을 스쳤다. 계속 산행을 이어갔다. 돌무덤 사이로 난 길로 들어가 쉼터를 찾았다. 은경과 앉아서 본 풍경이 떠올랐다. 앞이 탁 트이고 볕이 좋은 곳이었다. 서연이 김밥을 꺼내자 나는 손수 만든 반찬을 내놨다./ 서연은 팔 개월 전부터 이 주일에 반나절씩 봉사했다. 그녀가 자원봉사자임을 알고 나는 문전에서 그녀를 박대했다. 그 전에도 활동보조인과 자원봉사자가 왔으나 내 삶에 끼어드는 게 싫었다. 그땐 어둠 속에 혼자 있고 싶었다. 서연은 문밖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렸다. 나는 마지못해 문을 열어주었고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나는 로스쿨을 나온 변호사다. 평탄하던 인생이 갑자기 사달이 났다. 로펌 수습을 마쳤을 때쯤 시력을 잃었다./ 서연은 아이가 사고로 죽자 남편과 헤어졌다고 했다. 술에 취해 아이를 돌보지 못한 남편과 살 수 없었단다. 나는 변호사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상상하면서 가혹한 눈먼 현실을 외면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서연이 처음 왔을 시기도 그때쯤이었다. 그녀도 아이를 잃고 나서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털어놨다. 나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서연에게 몸을 살며시 기댔다. 그녀가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내 감정이 옮아가는 걸 느꼈다. 그녀가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정성껏 읽었다./ 쉼터를 나와 다시 산길을 걸었다. 케이블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는 그녀 팔꿈치를 살짝 잡았다. 발걸음이 편안하다. 그녀가 내 팔목을 잡았다. 나는 천천히 그녀 손을 잡았다.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봄을 느낀다.…

불행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장애는 잠재된 위험으로 늘 존재한다. 힘들 땐 등을 두드려주고 손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진정성 있는 측은지심만 있다면 위로받을 수 있다. 당한 사람은 따스한 손길을 갈망한다. 주위에 사람이 많을 것 같지만 막상 불행의 늪에 빠지면 도와 줄 사람은 잘 없다. 스스로 책망하며 어둠 속에서 옭아매기도 하고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하기도 한다. 운이 닿으면 의인이나 귀인이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 고난을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건 인생을 잘 살았다는 증거다.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다. 동병상련, 어려운 일을 겪어본 사람이 어려운 사람의 심정을 헤아린다. 그것만으로 위안이고 힘이다. 봄날 산행 길 동행이 인생 길의 동행이 됐다. 진실한 마음이 와 닿는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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