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품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 차갑고 반응이 없는 손/ 눈은 응시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지 않는다/ 오줌의 배출을 대신해주는 도뇨관(導尿管)과/ 코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음식 튜브를 떼어버린다면?// 항문과 그 부근을/ 물휴지로 닦은 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 넣어 곱게 접어/ 침대 밑 쓰레기통에 버린다//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다고 다짐하며/ 한쪽 다리를 젖히자/ 눈앞에 확 드러나는/ 아버지의 치모와 성기//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사타구니를, 허벅지를 닦는다/ 간호사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리며/ 팔에다 힘을 준다/ 손등에 스치는 성기의 끄트머리/ 진저리를 치며 동작을 멈춘다/ 잠시, 주름져 늘어져 있는 그것을 본다// 내 목숨이 여기서 출발하였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활화산의 힘으로 발기하여/ 세상에 씨를 뿌린 뭇 남성의 상징을/ 이제는 내가 노래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이것의 힘으로부터 왔다/ 지금은 주름져 축 늘어져 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나의 물건// 나는 물수건을 다시 짜 와서/ 아버지의 마른 하체를 닦기 시작한다

「열린시학」 (고요아침, 2011. 03)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아버지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자식이 큰 만큼 부모는 그 만큼 더 노화하는 이치를 모를 수 없다. 허나 막상 눈앞에 현실로 나타나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기본적인 신진대사도 불가능해 도뇨관과 음식 튜브를 달고서 송장처럼 누워있는 아버지 모습은 정말 허무하고 처참하다. 제일 힘든 일은 배설물 처리다. 아무리 단단히 마음먹어도 더럽고 역겹다. 핏줄도 그런데 하물며 남이야 오죽하랴. 갓난아기 때 부모는 맨손으로 똥 기저귀를 갈며 밝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지만 자식은 굳은 표정으로 몸을 사린다. 흉측한 까마귀가 다시 보인다.

몸을 닦아주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치부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쪼그라들어 쭈글쭈글 볼품이 없다. 보는 사람이 주위에 없는지 절로 눈동자를 돌린다. 거기에 그런 물건이 붙어있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렇다고 닦지 않을 수 없다. 귀두부분을 닦다보면 은근히 걱정도 된다. 행여나 단단해질까봐 조심스럽다.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껌 딱지 같아도 부끄럽지만 부풀어 올라 머리를 들어도 민망할 터다.

지금은 볼품없이 축 늘어져 있어도 한때 망주석 처럼 굳세게 일어나 활화산이 솟구치듯이 힘이 넘치던 때가 있었음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자극을 가해도 아무런 반응 없이 쭈그러져 있지만 새 생명의 근원이자 종족보존의 상징인 셈이다. 자신의 생명이 거기에서 나와 몸집이 커져서 사람 행세를 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새삼 숙연해진다. 비록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미션을 완수한 터다. 물수건을 다시 씻어 와서 청결하게 닦아줄 뿐이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간병하다 보면 오만가지 잡념이 떠오른다. 좋은 기억도 있겠지만 나쁜 기억도 많다. 기세 좋고 자신만만하던 아버지가 무력하게 쓰러져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할 법하다. 살아있는 동안 좀 더 잘해주지 못해 후회스럽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미안하다. 그런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아버지가 살짝 서운하다. 도발적일 정도로 솔직 담백하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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