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이융재 ‘백천계곡 단풍터널’

발행일 2021-11-29 17: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문수암으로 가는 중이다. 현불사를 지나서 백천계곡 길이다. 기암괴석과 산 그림자는 맑은 물에 모습 드리우고 단풍이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있다. 사람들은 화려하고 불타는 듯한 단풍의 물결이 매혹적인 설악산 천불동 계곡 쪽을 많이 찾는다. 하지만 나는 태백산 백천계곡 단풍터널을 위 반열에 올린다. 은은하고 고즈넉하기까지 하여 더 가깝게 다가오고, 조용히 사색에 젖을 만하기 때문이다.

백천계곡에서 가장 검붉게 물드는 것은 당단풍나무 잎이다. 빨간 것은 회나무이며 불그스름한 것은 복지기나무이다. 산벚나무 잎은 붉은 듯 갈색을 띤다. 노란 것은 생강나무 잎이며 노르끼리한 것은 산겨릅나무와 함박나무이다. 같은 단풍도 위치와 환경에 따라서 이렇게 여러 가지로 다른 색채를 뽐내게 된다.

단풍의 종류만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어린잎이 성장하지 못하고 생명을 다한다. 내부의 병과 외부의 공격 때문이다. 그뿐이던가. 단풍이 빛나는 것은 먼저 먼 길로 떠난 다른 단풍이 있기 때문이다. 미처 물들지 못한 어린잎과 먼저 길을 떠난 친구들의 열렬한 응원을 기억한다. 단풍에서만 고귀한 희생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지금의 찬란한 모습을 만들기 위하여 봄부터 잎은 끊임없이 영양분을 만들며 성대한 잔치를 준비했다. 찬바람이 불어오면 잎은 나무와의 이별을 생각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내년을 준비하고 있다. 아름다운 것은 수명이 짧은 것일까?

인생도 젊음의 날들은 매우 짧은 것일까? 나도 나뭇잎같이 꿈을 품은 새싹인 적이 있었다. 물이 올라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뜨거움 속에서도 굵은 땀방울로 찬란한 젊음도 빛냈다. 무지갯빛을 따라 앞으로 놓인 꿈길을 달리기도 했다.

젊은 날에는 사서 고생도 한다고 했다. 부모님과의 이별, 취직과 결혼, 자녀의 성장과 더불어 삶의 현장은 무척이나 바빴다. 빡빡한 가계와 모자라는 학업을 메워야 했고, 집 장만과 승진의 관문은 어렵고도 힘들었다. 치열한 삶의 전장이었다. 계속되는 변화와 도전의 무대에서 갈 길 몰라 헤매기도 했다. 실패와 좌절의 뒤안길에서 분노하였고 절망의 늪에서는 허우적거렸다. 다른 길로 가지 못한 자신을 끝없이 나무랐고 무거운 삶의 현장에서는 숨고도 싶었다.

하지만 인생의 교향곡에는 ‘비창’만 있는 게 아니고, ‘영광’과 ‘합창’도 있었다. ‘개선행진곡’의 주악 속에 가을 단풍의 향연에 초대도 받았다. 오방색 곱게 물든 무대 위에서 홀로 연기도 하여 보았다. 그렇듯이 공들여서 어렵게 선 무대이건만, 아쉽게도 언제 연극이 끝났는지도 모르게 막이 내려왔다.

그래도 단풍철만 되면 떠오르는 게 있다. 나는 그래도 젊고 짧은 단역에서 시작하여 주역도 맡아보고 내려올 수 있었지만, 소식조차 뜸한 많은 단역과 중견 배우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른다. 그들의 뜨거운 정열과 희생으로 오늘도 연극의 무대는 계속되고 있는데.

생활이 메말랐다고 감정도 메마른 것은 아니다. 오색 단풍은 많은 사람을 설레게 하고 길을 멈추게 한다. 어려움과 시련을 거친 뒤에 얻은 단풍의 아름다움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차가운 계절의 눈밭 길을 준비하고 있는 단풍의 아름다움은 묵묵히 완성된다. 고매한 자태, 바로 그것이다.

내 삶의 단풍은 어떤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도 해보지만, 불현듯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할 때도 있다. 잘 다려진 교복 같기도 하고, 비 맞고 후줄근한 누더기 같기도 하다. 어떤 색으로 물들었을까. 내려놓고 떠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고독과 외로움의 허드렛물은 아닐까.

늘 푸름만 뽐낼 수 없는 잎사귀같이 가을에 들어서면 새로운 단풍으로 우리의 모습도 새 단장을 하는 것이 대자연의 이치가 아니던가. 메마른 심장을 가진 이도 화려한 가을 단풍 앞에서는 그 진한 색감에 물이 들고 한 잔의 차를 찾게 된다. 무서리를 맞은 단풍은 나를 설레게 하고 걸음을 멈추게 한다. 시련과 풍상을 겪은 단풍은 자기완성의 달관된 모습을 보여 준다. 나의 단풍도 이제는 모든 것을 갈무리할 때다.

백천계곡 길을 오른다. 낮게 뿌리던 안개가 걷히고 물밑의 열목어가 인사를 한다. 단풍의 속살이 물에 어리어 더욱 맑고 곱다. 이 가을 나는 흔들리고 있고 내 삶의 단풍은 진행형이다. 더 붉게 물들고 싶으면 또 오라고 단풍이 유혹한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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