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신유 장군 유적지

발행일 2021-11-28 18:39:4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동북아 정세 현실 목격한 최초 무관, 북벌론 허상 깨닫다

패배를 몰랐던 신유, 용맹함은 사당에서도 발현



호국 평화의 도시로 잘 알려진 경북 칠곡군은 과거부터 국방의 요충지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전쟁의 최대 격전지이다.

특히 6·25전쟁 당시 무려 55일간 혈전이 벌어졌으며, 구국의 위기 상황에서 전세를 역전시킨 ‘다부동 전투’가 벌어진 역사의 산 현장이다.

그런 칠곡군의 평화와 치안을 책임져야 할 칠곡경찰서장이 부임하게 되면 으레 불문율처럼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칠곡이 낳은 영웅 신유 장군의 묘소다.

◆조선 후기 최고 무장 신유, 그의 생애 속으로

조선 후기 최고의 무장 중 한 명이자, 나선정벌의 영웅 신유 장군은 그 찬란한 업적에 비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평생 무관으로서 나라에 충성한 신유 장군은 광해군 11년(1619)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렸을 적 무과에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지만, 향사에 낙방하면서 무과로 전환하게 된다.

당시 낙방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대부의 사업이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에서 그의 대범하고 화통한 성격을 짐작할 만하다.



무과로 전환한 신유 장군은 인조 24년(1646) 27세의 나이로 급제한 이후 선전관을 거쳐 비변사, 함경북도 병마우후, 수군절도사, 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우포도대장 등 여러 핵심 무관직을 역임했다. 특히 함경북도 병마우후로 있던 시절 그는 청나라군과 연합해 흑룡강(헤이룽강) 유역에 진출한 러시아군을 물리치면서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신유 장군이 무관직만 수행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강진현감, 김해부사, 장단부사 등 지방 수령으로 부임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나선정벌의 영웅이면서 무관으로서 변방을 지킨 신류 장군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기록하고 있다. 문관이 아닌 무관에게 문무를 겸비했다는 평가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효종도 충성스러운 무관인 신 장군을 대단히 총애했다. 1655년 효종이 직접 신유 장군을 금원으로 불러 술을 대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조선시대 숨겨진 역사…러시아와 맞선 나선정벌

러시아는 16세기 말부터 우랄산맥을 넘어 동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러시아의 극동 진출은 모피 자원을 얻기 위한 경제적 목적이 크게 작용했다.

17세기 러시아의 스테파노프 장군은 흑룡강 유역의 까자크 부대장으로 임명되면서 인근 토착민을 노략질했다.

당시 명 토벌에 주력했던 청나라는 반대급부로 동북지역의 군사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러시아군이 송화강과 흑룡강 유역을 전방위적으로 약탈했지만, 속수무책으로 털릴 뿐이었다. 다급해진 청나라는 조선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효종 5년(1654)의 일이다.

변급 장군이 나섰던 제1차 나선정벌은 84일간 진행됐다. 조선군은 별다른 무력 충돌도 없이 전원 무사히 귀국했다. 러시아 수군이 전투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제풀에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4년 후인 1658년 청나라는 재차 조선군의 파병을 요청했고, 이때 전면에 나섰던 이가 바로 함경북도 병마우후로 있던 신유 장군이다. 신 장군은 조선 정예군 300여 명을 이끌고 흑룡강 유역으로 출병했다.



비록 조청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지만, 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조총부대는 막강한 화력을 보여주면서 흑룡강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다. 러시아 선단 11척 중 10척을 불태우고 스테파노프 등 적 지휘관 및 병사 270명을 섬멸하는 전공을 올리고 돌아왔다.

이 위대한 나선정벌의 과정이 기록된 것이 신유 장군의 ‘북정일기’다. 북정일기에는 약 4개월에 걸친 나선정벌의 발생과 전개가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객관적으로 서술돼 있다. 당시 흑룡강 전투에 참전했던 조선군의 활약과 역할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북정일기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 뒤편에 숨겨진 영웅, 재조명받다

나선정벌의 영웅 신유 장군의 벼슬은 높아졌지만, 그의 업적은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나선정벌이 효종의 정치적 명분인 북벌론에 막혀 공론화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훈련한 조선군 조총병은 당초 효종이 청나라에서 일으킨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양성된 정예병이었다. 그런 조총병이 청나라의 요청으로 나선정벌에 동원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함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대사회에서 재조명받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는 조선 시대 유일한 해외파병사에서 승리한 영웅이다. 수많은 외침을 극복한 한국의 역사적 시각에서 볼 때 해외로 군사를 파병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중에서도 승리의 역사는 신 장군이 유일하다.

신유 장군은 동북아 국제정세를 경험했던 조선 최초의 무장이라고도 평가받는다. 조선과 러시아는 나선정벌을 통해 역사적으로 처음 만났다.

신 장군은 나선정벌에서 청나라와 러시아가 충돌하는 동북아 국제정세의 현실을 목격했다. 나선정벌의 승리 덕분에 청나라와 러시아는 당분간 평화를 유지했다. 이후 꽤 오랫동안 지속된 동북아의 평화는 신 장군과 조선군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유 장군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상상력을 동원했던 미지의 땅에 대한 동경을 실제로 목격한 인물이다. 당시 청나라와 러시아의 접경 지역인 송화강과 흑룡강 유역까지 답사한 조선의 지식인은 아무도 없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광활한 북만주의 지리는 너무도 멀고 아득한 영역으로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지휘관으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다. 그가 훈련한 조선군 조총병의 사격술은 청나라보다 월등한 수준이었다. 새로운 수석식 소총을 도입한 인물도 신유 장군이다. 그가 반입한 수석식 소총은 우리나라 화기 발달사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

◆천하의 명당이 이곳이로구나

신유 장군이 태어난 칠곡군 약목면 인근에 마련된 신유 장군 유적지는 풍수지리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과연 이곳이 천하의 명당이로구나’라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산수가 유려하다.

정남향으로 배치된 유적지 앞으로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 유유히 흐른다. 뒤로는 야트막한 시묘산이 유적지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형태이며, 어깨너머로는 비룡산이 우뚝 솟아 눈을 즐겁게 했다.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곱게 포장된 돌길 위로 내려 보고 있는 정문(북정문)은 흡사 서울 종묘를 옮겨놓은 듯 위엄과 박력이 넘쳤다.

열여섯 개의 돌계단을 올라 심호흡을 한 뒤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는 마당과 3개의 목조건물이 맞이한다.

이곳은 다부동 전투 당시 북한군의 포진지로 활용됐다고 한다. 낙동강을 사이로 북한군과 연합군의 치열한 고지전이 이뤄졌을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다.

유적지에는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마당 한편에 있는 파손된 비석이다. 2개의 비석 중 좌측 비석의 머리는 전쟁 당시 포탄을 맞아 깨졌고, 우측 비석은 현대에 들어 새로 복원한 것이다.

마당에 심겨 있는 모과나무, 산수유나무, 목련, 백일홍 등은 생전 장군의 고상한 성품을 보여주는 듯 과하지 않고 담백하다.

마당 좌편에 있는 존성재는 이 사당을 관리하는 종중 사람들이 기거했던 곳이다. 근현대사의 큰 인물이자 같은 평산신씨 문중인 신익희 선생이 직접 쓴 현판이 존성재의 존재감을 한층 멋스럽게 만든다.

정면에 있는 또 하나의 문(선위문)을 열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엄숙한 분위기가 펼쳐진다.

조선은 유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던 왕조다. 유교에선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체로 분리돼 영혼은 하늘로, 육체는 땅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의지할 수 있도록 상징물을 만드는 데 그것을 신주라고 부른다. 신유 장군의 신주와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 바로 숭무사다.

사당은 엄숙한 무게감이 가득했다. 생전 패배를 몰랐던 신 장군의 용맹함과 기세가 장내를 지배하는 듯했다.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이곳은 장군의 별세일인 음력 1월15일(정월 대보름)이 되면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 향사가 열린다. 이 향사에는 칠곡군의 단체장과 주요 인사들이 모두 참여한다. 호국의 도시 칠곡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인물이 바로 신유 장군이기 때문이다.

사당 뒤편에 있는 야산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고 양지바른 곳에 신유 장군과 그 부인의 묘소가 있다. 생전 전쟁터에서 패배를 몰랐던 명장은 죽어서도 그 고장을 지키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숙연해졌다.

현재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세계 양대 강국인 미·중의 패권 경쟁 속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맞고 있다.

나선정벌을 통해 청나라와 러시아가 충돌하는 동북아 국제정세의 현실을 목격했던 최초의 무관이자 북벌론의 허상을 일찍이 깨달았던 신유 장군. 그가 현세에 살아 있었다면 과연 어떤 조언을 했을까 자못 궁금해졌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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