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

발행일 2021-12-01 10:16:2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김준식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오전 외래를 마치는 데, 수간호사가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밖에 있는데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환자의 보호자인가 하고 별 생각없이 만난다고 했는데, 왠 아가씨가 들어 오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기억이 나지 않아 당황했지만, 그 옆에 계시는 어머니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어떻게 오셨는지 물으니, 10년 전까지 뇌전증으로 진료를 받다가 완치됐는데, 이번에 소방공무원 신규채용시험에 최종 합격했다는 통지서를 받고, 꼭 나를 만나야 할 것 같아 인사하러 왔다면서 합격증명서를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다. 어릴 때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된다”는 위로가 큰 힘이 됐고, 뇌전증을 가진 아이들이 동산병원 의료박물관에 모여 그림을 그리고 상품도 주는 행사를 했는데 동생과 함께 참가해서 큰 상을 받았고 아직도 그걸 자랑스러워 한다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 남매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되고, 힘이 됐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천재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독일의 드레스덴을 방문했을 때 미술관에 있는 라파엘로의 시스틴 마돈나(식스투스의 마돈나)라는 작품을 보게 됐다. 턱을 받히고서 천진스럽게 아기 예수와 마돈나를 바라보는 어린 천사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넋을 놓고 있다가 라파엘로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바티칸 박물관에 갔을 때 ‘아테네 학당’이라는 라파엘로의 유명한 작품도 무척 좋았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의 변용’이라는 작품에 압도당해 30분 넘게 지켜 보다가 다시 들어가 보고 또 봤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거룩하게 변형된 모습을 소재로 한 이 그림은 천상의 신비로운 광채와 지상의 소란스러운 모습을 대조시킨 구도를 가지고 있다. 그림의 윗부분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 엘리야가 그려져 있는데,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처럼 희어져 있고 환상적인 흰 광채 속에 조용함과 정숙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돼 있다.

그 아래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놀라고 경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이때 성질 급한 베드로가 여기 있는 것이 좋으니 초막 셋을 짓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마지막 부분에는 경련하는 아이를 두고 다른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이 극도의 공포와 혼돈 속에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경련하는 아이의 모습은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 있고 오른 팔이 뻗어 있으면서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가 있고, 왼쪽 팔이 조금 굽혀 있는 모습으로 보아 우측 뇌의 보조운동영역에 병변이 있는 경련의 모습으로 보인다.

현대 의학은 24시간 뇌파 모니터링을 통해 경련의 모습과 뇌파의 모습을 함께 비교해 뇌의 어느 부분에서 병변이 있는지 밝혀낼 수가 있는데 전형적인 운동보조영역의 병변이 있을 때의 경련의 모습이다.

간질에서 뇌전증으로 용어가 변경된 이후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뇌전증에 대해 적지 않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낫지 않는 난치병이다, 유전된다, 경련약을 쓰면 머리가 나빠진다, 결혼할 수 없다,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등등의 잘못된 지식 뿐만 아니라 이 질환을 가진 아이들을 차별하는 사회적 낙인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알렉산더대왕, 율리어스 시저, 나폴레옹, 잔다르크,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도스토예프스키, 바이런, 차이코프스키, 노벨 등은 모두 뇌전증을 앓았던 사람들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이라는 그림을 보면서 뇌전증을 극복하고자 하는 학자와 환자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늘의 높고 큰 비밀을 깨달아 감격하면서 살고자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아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있다. 그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세상의 잘못된 낙인과 편견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나의 소명이라 생각했다. 소방 공무원 합격증을 가지고 인사하러 온 그 어여쁜 아가씨가 비록 뇌전증이라는 질환이 있었지만 이를 꿋꿋이 이겨냄으로써 오히려 세상의 온갖 질병과 장애를 가진 많은 환우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는 모습에 감사하면서 의사로서의 보람을 느끼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된다.

김준식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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